지하철 5호선 '을지로 4가'역 3번 출구로 나와서 곱창처럼 복잡하게 꼬인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페인트 칠이 벗겨진 철물점, 공업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달고 비둘기 형상을 한 철제 조각물 부터 유리 공예 아트 공방들이 올망 졸망 모여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1970년대 대대적인 개발 붐 시대에 서울 을지로 일대는 "탱크, 잠수함도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불릴 만큼 철공소, 자재상, 인쇄공장 수천 개가 모여 있는 숙련공들의 피, 땀, 눈물이 배어 있는 서울 안의 산업 단지였지만 현재 을지로는 설치 예술가 집단의 거대한 작업실이 되었다.
한옥이 있던 자리를 허물어서 공업사와 소형 공장들이 들어 섰던 곳이 제조업의 쇠락으로 슬럼화 되기 직전에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고 나서 골목길 마다 예술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모터 가게, 인쇄소, 주물 가게, 유리 가게들이 모여 있어서 원스톱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을지로는 서울 안 교통의 중심지에서 저렴한 임차료로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 져 있어서 예술가들에게 천국이다.
을지로 세운상가 터에 매달 50여명의 신청자들이 대기 할 정도로 입점 할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해 졌고 임차료까지 나날이 치솟고 있다.
작업실 임대료가 치솟을 때마다 거처를 옮겨 다녔던 시각 예술가 '휴일'은 예술가들에게 천국 같은 환경을 제공 하는 을지로에 들어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작업 활동을 시작한다.
'내게도 직업이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콜라주를 하고 사진을 찍고 소리를 채집한다. 글자를 모으고, 때로는 사람들에 질문을 던지며 그것을 기록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를 시각 작가 혹은 설치 미술가라고 부르고 내가 하는 일을 다윈예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과연 돈을 벌기는 커녕 쓰기만 하는 걸 직업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둘 수도 없다. 너무 많이 와버렸다.'
-이지의 <노란 밤의 달리기> 중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한 휴일의 동기들 중에서 함께 작업하는 태유를 제외하고 다른 동기들은 예술가가 아닌 다른 길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휴일은 생계 걱정을 할 정도로 벌이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동기생 태유와 '매트리스 매트릭스' 팀으로 활동해서 '주목할 만한 신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 받았지만 그 상이 오히려 그의 인생에 독이 되어 버렸다.
작품이 팔리지 않았지만 작업을 멈추지 못한 휴일은 입시 과외나 백화점 문화 센터와 구청에서 간간히 일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다.
아빠가 게이란 사실을 알고 엄마가 어린 휴일을 옷장 속에 버리고 떠났다.
어쩌다 사진을 전공한 휴일에게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 조차도 예술적 영감이 되어 서른 살을 앞두고 세운상가에서 ‘서식’하는 예술가로 살아 간다.
'안다. 버림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새끼 펭권인 척할 수도 없다. 나는 성인이고 아버지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사실 아버지와 사는 게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두 남자가 데면데면하게 사는 집. 고독만 두 배다. 그래도 누군가 떠난다는 건. 그래서 오는 코끝의 알싸함은 심장까지 닿는다.'
가난한 예술가 휴일에게도 '엘'이라 불리는 여자 친구가 있다.
휴일은 여러 명의 여자와 원 나잇 동침을 하고 나서도 언제나 '엘'에게 돌아간다.
'휴일'은 엘과 3년 째 만나는 동안 울며 고백하며 모든 이야기를 들어 준다.
'나는 사실 여자였어요. 분명히 여자애였는데, 엄마가 집을 나가고 얼마 후 남자가 됐어요. 내 기억은 또렷한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요.'
여자 아이였지만 엄마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 남자가 되고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엘이라는 여자는 알록달록한 곰 젤리 하리보를 입에 달고 살고 있는 젤리 중독자다.
기억 속에 침착 되어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휴일은 사랑에 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 많은 연상의 ‘엘’과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에 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밤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 그대로 착즙해서라도 내 매력을 찾아주는 그리고 가감 없이 표현해주는 엘이 좋다. 그것이 낮의 엘이든 밤의 엘이든, 별이 빛나는 엘이든 폭우의 엘이든 엘의 피부와 향기, 신음이나 숨결, 목소리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과 숨결, 엘의 몸 속의 물, 그것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좋다. 그걸 좋아하는 걸 엘도 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밤의 카니발을 지낸다. 이십대의 끝, 나는 엘에게 내 육체를 헌신한다.'
기나긴 생활고 속에서 사랑으로, 예술로 삶을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 허황돼 보이고, 차라리 동물적 꿈을 함께 꾸는 반려견이나 입 속에서 쫀득한 맛과 향을 내는 젤리 하리보가 힘이 되어주는 웃픈 현실 앞에서 사람이 몸에 색을 칠하고 스스로 동물 우리에 들어가 살고 있는 모습을 부러워 한다.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서 환상과 기억 사이를 수시로 오고 가는 휴일과 그 또래들은 부모에게 버림 받아 꿈 많았던 20대 청춘 시절에 도시의 재생 마중물로 쓰이다가 버려져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는 법을” 모른 채 “받아본 적이 없이' 살다가 어느 덧 사회의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해 버린다.
동물의 우리 안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고 있는 휴일의 동기생 '핑크스핑크스'라 불리는 태유의 아버지도 꿈을 꾸고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동물들도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여러 구역을 전전 하다 을지로 한 복판 세운 상가에서 작업을 시작한 휴일은 인간의 목소리가 내지른 말의 높낮이와 떨림, 강세 같은 소리를 채집한다.
그는 목소리를 채집 하는 동안 한 껏 들뜬 목소리를 내지르기도 하고 울먹이기도 하고 애원 하기도 한다.
휴일이 채집한 인간의 목소리의 톤이 오르락 내리락 할 때 마다 그를 둘러 싼 주변인들의 삶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의 몸과 하나의 얼굴이 있다.'
동물원에서 발생한 갑자스런 화마에 잿가루가 되어버린 태유의 아버지는 죽어서 더 유명해 졌고 음식으로 유명해지겠노라며 세상을 유랑 했던 아버지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자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외롭고 연인이 있어도 외롭다.
따라서 생은 외롭지 않으면 괴롭고, 괴롭지 않으면 외로운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소리를 제대로 듣게 되고 냄새를 맡아서 주변의 낌새를 알아차리게 된 아버지를 통해 휴일은 소리의 감각이 펼쳐 보인 세상을 알게 된다.
휴일은 돈을 벌어 음식을 먹고 잠자를 구하는 생존이 아닌 숨 쉬는 생존을 하기 위해 밤의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한다.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휴일의 시야에 눈가루가 흩날린다.
달리면서 얼굴에 달라 붙는 눈가루들 눈위의 눈, 눈에 눈들이 그의 머리 위에 쌓여 간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달리는 동안 온 몸에 땀으로 범벅이 된 휴일의 머리 위에 내려 앉은 눈은 어느 새 촉촉한 물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 모든 것들의 전성기는 찰나다.
모든 것이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의 운과 이치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 순간, 누군가의 인생을 가로 막고 있던 어둠이 잠시 걷혀서 빛이 들어 온다.
그 빛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지만 그 빛을 단 한 번이라도 받아 보았다면 남아 있는 생 앞에 놓인 어떤 고난도 역경도 이겨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