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을 좋아했다. 짜깁기에 불과하지만, 대학 졸업 논문도 서머싯 몸을 썼었다. 입대를 앞두고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인간의 굴레>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주인공 필립의 인생 역경이 어찌나 몰입되던지. 서머싯 몸 작품 중에서 읽기 난해하거나 지루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내가 다녔던 영문과에서 서머싯 몸을 비중있게 취급하지 않았다. 고전을 주로 다루는 영문학과에서 다룰 만큼 문학적 깊이나 문학사적 입지가 그다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나는 깊이 존경하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런데 최근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었다. 에밀 졸라하면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를 흔히 떠올리는데 나는 에밀 졸라의 책이라면 모두 구매해서 재미없는 책에 실망했을 때 하나씩 꺼내 읽는다. 에밀 졸라 역시 실패가 없는 작가다. <작품>은 에밀 졸라의 평생 친구였던 세잔을 모델로 삼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클로드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완성하지 못하는 걸작에 집착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인물. 세잔은 파멸한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심한 충격과 모욕을 느껴 졸라와의 우정을 끊었다.
<작품>을 읽다 보니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서머싯 몸이 왜 통속소설가로 치부되는지 이해가 되었고 <달과 6펜스>가 왜 그토록 많이 읽히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 흔히 예술가 특히 화가의 소설이라고 하면 <달과 6펜스>를 흔히 떠올리는데 에밀 졸라의 <작품>이야말로 화가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술에 몰입하는 화가의 인생을 이토록 치열하고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와중에 600쪽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재미까지 놓치지 않았으니. 화가에게 그림의 소재로 삼을 게를 주고 그림값으로 게를 주겠다는 화상, 자기 아내를 누드모델로 삼은 남편, 남편의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이 되어 준 아내,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5시간에 걸쳐 아들을 화폭에 담는 일에 몰두한 아버지 화가. 끝내 아내를 버리고 대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살하는 남편.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으면서도 읽는 극강의 재미도 놓치지 않는 소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쓴 고전 작가. 에밀 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