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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고비 너마저

작년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작을 읽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도 요즘 번역본이 나오고 있어 두 편 (<장미와 주목>, <딸은 딸이다>) 읽었는데, 딱히 내 취향도 아니고 이 책들까지 읽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장편"에 한정하기로 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지워나가고 있다. 


어렸을 때 팬이었기 때문에 그때 워낙 많이 읽었다. 그런데 그때 읽은 책인지 안 읽은 책인지 지금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 지난 주에 읽은 <에지웨어 경의 죽음>은 다 읽고 나서야 <13인의 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어릴 때 읽은 책이라는 게 기억이 났다. 그래도 유명우 번역이 아닌 책으로 다시 읽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아마 이 목록에서도 읽었는데 잊어버린 것도 있고 안 읽어 놓고 지운 것도 있을지 모르겠다. 손에 들어오는 대로 한글로도 읽고 영어로도 읽으면서 하나씩 확인 중이다. 


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

The Secret Adversary

The Murder on the Links

The Man in the Brown Suit

The Secret of Chimneys

The Murder of Roger Ackroyd

The Big Four

The Mystery of the Blue Train

The Seven Dials Mystery

The Murder at the Vicarage

The Sittaford Mystery

Peril at End House

Lord Edgware Dies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Why Didn't They Ask Evans?

Three Act Tragedy

Death in the Clouds

The A.B.C. Murders

Murder in Mesopotamia

Cards on the Table

Dumb Witness

Death on the Nile

Appointment with Death

Hercule Poirot's Christmas

Murder is Easy

And Then There Were None/Ten Little Indians

Sad Cypress

One, Two, Buckle My Shoe

Evil Under the Sun

N or M?

The Body in the Library

Five Little Pigs

The Moving Finger

Towards Zero

Death Comes as the End

The Hollow

Taken at the Flood

Crooked House

A Murder is Announced

They Came to Baghdad

Mrs McGinty's Dead

They Do It with Mirrors

After the Funeral

A Pocket Full of Rye

Destination Unknown

Hickory Dickory Dock

Dead Man's Folly

4.50 from Paddington

Ordeal by Innocence

Cat Among the Pigeons

The Pale Horse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The Clocks

A Caribbean Mystery

At Bertram's Hotel

Third Girl

Endless Night

By the Pricking of My Thumbs

Hallowe'en Party

Passenger to Frankfurt

Nemesis

Elephants Can Remember

Postern of Fate

Curtain

Sleeping Murder








<잠자는 살인>은 틀림없이 읽었다고 생각한 책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주인공(그웬다)가 꽃무늬 벽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 장면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읽은 적이 없고, 그 장면은 텔레비전에서 본 거라는 게 기억이 났다.. 내가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조운 힉슨이 나오는 미스 마플 시리즈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본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꽃무늬 패턴에 대한 사랑은 그때 그 장면이 각인되어 시작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아무튼 그래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생각이 안 나니까 다시 읽었다. 그런데 요즘에 크리스티 책을 읽으면 처음 보는 책이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빤히 보인다. 어릴 때는 이런 능력이 없었는데... 그래서 좀 시시하게 느껴져서 슬프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 범인이 누구인지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슬프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하냐 하면, (일부 스포일러지만) <잠자는 살인>에서 호주에 살던 그웬다가 영국에 처음 와서 살 집을 고르는데, 어떤 집이 마음에 쏙 들어서 당장 그 집을 산다. 그러고 그 집을 돌아보면서 여기에는 이런 장식이 있었으면 좋겠고.. 여기는 이렇게 바꿨으면 좋겠고.. 여기는 꽃무늬 벽지가 있었으면 좋겠고.. 인테리어에 대한 이런 저런 소망을 펼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 그 집은 그웬다가 어릴 적에 잠깐 살았던 집이었고 (그 시간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웬다가 떠올린 것은 소망이 아니라 사실은 기억이었다는 거다. 


바로 그거다. 우리가 소망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기억일 때가 많다. 자식에 대해서도, '좀 밖에 나가서 놀지 그러니' '만화 같은 거 그리면서 놀면 재밌을 텐데' 이런 소망을 품지만 사실은 다 내가 어릴 때 놀았던 기억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망이다. '세상이 너무 물질주의적이야. 불평등이 너무 심해. 달라져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진취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복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인 걸까.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품는 소망도 새로운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과거에 비추어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나이 든) 사람은 결국 보수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나. 


아니 그러니까 우리 모두 보수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ㅜㅜ 물론 사상에 방향성이라는 건 분명히 있고 경험이나 시간의 순서와 상관 없이 어느 쪽이 진보고 보수냐는 상당히 명백하다. 다만 개인의 차원에서 꿈꿀 수 있는 건 경험과 기억이 극복과 부정의 대상이 아닌 한은, 아주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닌 한은, 경험과 기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좀 슬퍼졌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어떤 기억의 프레임을 기준으로 소망을 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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