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스트로벨의 <기적인가 우연인가>를 읽다가 키너를 알게 됐다.
사실, 나 스스로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몇 번 확실하게 접하기도 했고, 지금 공부 중인 '죽음학'을 중심으로 기적 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었는데, 이 책은 기적 연구서의 끝판왕이다. 그만큼 문자 그대로 방대하고 문자 그대로 정교하다. 종합적이기에 두껍다. 게다가 각주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적 행위자의 추종자이자 카리스마적 운동의 구성원이면서 대체로 그리스-로마의 엘리트가 아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 엘리트 역사가들보다 기적 주장에 더 마음이 열려 있었다. 우리가 무슨 근거로 이 차이로 인해 그들의 접근법이 그 시대 엘리트들의 접근법보다 열등하다거나, 그 접근법의 역사적 내용을 감소시킨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234)
죽음학을 공부하다 보면 (참고로 죽음학의 대가들은 거의 다 최고의 엘리트 의사들이다. 아무래도 심폐소생술이나 응급의학의 발달 등으로 인해 기적 같은 의학현상을 자주 접하다 보니 그런듯) 도저히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사태들을 목격하게 된다. 니버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논리적 인과성이나 합리성을 바탕에 둔 설명 방식은 하위 수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간혹 아니 자주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은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나 우연에서 섬광처럼 일어날 때가 많지 않은가.
"우리가 역사적으로 고대에 선호된 전제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현대 학계의 전제들도 고려해야 한다. --- 이전 시대의 세계관이 일시적이었듯이 우리 시대의 세계관도 일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현재의 학자들에 대한 후세대의 해석자들이 이 점을 고려할 것이다."(250)
계몽주의의 열기가 왜 식었겠는가. 이성의 도구성이 왜 드러났겠는가. 포스트모던의 등장이 왜 강력했겠는가.
완벽한 이론은 없다. 어떤 이론이든 틈새가 있다. 그리고 빛은 그 틈새에서 온다. 그게 공백(바디우)이든 구멍(라캉)이든 우리는 '이해한다'라는 말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나 임사체험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보고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중립적인 인류학 민속지나 의학자료, 선교보고서, 가톨릭 교구청 지하 서류함 앞에서도 눈을 감아 버린다.
"무죄로 증명될 때까지 유죄라는 회의주의에서 시작하는 것을 논리학자들은 대체로 우물에 독을 푸는 오류로"(242) 보는데, 우리들의 대화라는 게 시작의 거개가 그러하다.
흄은 기적에 관한 가장 적대적인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 흄의 영향을 받은 칸트 역시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악영향을 남겼다.
한 가지만 말해보자면, 칸트는 흄의 영향을 받았다고 명시하면서 선언한다. 흑인들은 정신적 역량이 열등하며 천성적으로 사소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는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 또한 흑인들은 자기들의 방식대로 허영심이 아주 강하고 말이 많으므로 매질을 통해서 그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472쪽 참조)
맞는 말인가. 기실 이러한 악마적 편견들은 흄이나 칸트 외에도 헤겔이나 마르크스, 베버에게서도 볼 수 있다.(송두율, 계몽과 해방 참조)
반초자연주의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공략하는지, 1권의 반절이 거의 논파로 이루어져 있다. 징글징글할 정도다. 신뢰도는 그러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