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킹맨션의 보스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바람돌이 2025/08/04 21:13
바람돌이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오가와 사야카
- 16,650원 (10%↓
920) - 2025-06-20
: 14,115
오래 전 20대때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을 다녔다. 외진곳에 있던 지역 답사를 다니다보니 항상 교통편이 문제였고, 버스를 2시간 기다려야 되는데 뭐 5km야? 그럼 걷지 뭐, 걷다가 힘들면 지나가는 차 세우면 태워줄거야 이러고 많이 걸었다. 거의 대부분 그렇게 걷고 있으면 지나가던 자동차가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고 태워줄 때가 많았고, 가끔은 트럭 짐칸이나 경운기도 탔더랬다. 그래도 대가를 바라지 읺는 친절은 이후 내가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골길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면 일단 세워서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어보는 친절로 되갚아졌다. 젊은이들도ㅜ있었고 읍내 나가는 할머니들도 있었고 등등....
몇년 전에 유튜브에 서울 만남의 광장에서 히치하이크를 하려던 유럽인이 몇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치하이크에 실패하자 한국에서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올린 짤이 화제가 됐었다. 이건 대중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진 한국 사회에서 히치하이크 문화가 거의 없는 한국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해프닝으로 나는 해석했다. 하지만 오늘 <청킹 맨션의 보스는 알고있다>란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각도로 이 문제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히치하이킹에 실패한 백인들의 주장대로 인종차별은 아니다. 한국인이 그렇게 팻말들고 서 있었어도 실패했을 테니까말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나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차를 세우던 시절의 우리의 심성과 자본주의적 감성 충만한 지금의 우리의 심성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홍콩의 청킹맨션에는 자칭 타칭 보스인 카라마가 있다. 보스라는 말과 오래된 헝콩 아파트는 예전 느와르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 뭔가 법죄집단의 느낌이 풍기지만 전혀 아니다. 이곳은 중국과 홍콩의 중고물품들을 수입하거나 탄자니아의 원석을 판매하려는 장사꾼들의 집결지이다. 이들 탄자니아 장사꾼들 사이에 형성돤 문화를 작가가 추적하는 것이 책의 내용이다.
청킹맨션을 중심으로 형성된 탄자니아인들의 공동체에 거쳐사는 인물들의 정체성의 규정부터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 정주자와 일시적 여행자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국가의 구성원들과 다르게 이들의 대부분은 흘러가는 사람들이다. 어쩌다보니 20년째 헝콩에 거주하는 카라마같은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곳을 거쳐 고향이든 어디든 거쳐가는 사람들이다. 카라마 역시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다만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까 때가 되면 가겠다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사람들이니 한 번 보고 말 사람들도 많고 사기꾼도 많고 그래서 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 이 공동체가 공동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럼에도 공동체가 성립된다는 것에 작가가 발견한 놀라움이 있다.
이들은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호수성(호혜성, 상호성이라는 의미에 당한만큼 갚아준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저자주에서 설명)을 기반으로 한 사업모델과 생활보장 구조를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31쪽
이런 그들의 공동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객지에서 죽은 탄자니아인들이 있을 때 이들의 대응이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 죽든 고향에 가서 묻혀야 한다는 풍습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시신을 머나먼 탄자니아까지 옮긴다니 어마어마한 일이다. 대부분의 탄자니아 가족들은 그 돈을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 그러면 카라마를 비롯한 탄자니아인드이 움직인다. 그들은 조합을 통해 기금을 모금한다. 회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기도 하고 관련있는 모든 이들과 채널을 동원해 시신을 운반하고 고향에서의 장례식까지 치르는 것이다. 감동스럽기까지 한 이런 장면은 인류애의 한 장면으로 보이지만 정작 이를 행하는 탄자니아인들은 대단한 인류애를 말하지 않는다. 할수 있으면 하는거고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겸사겸사 하는 것이다.
이 겸사겸사의 행위들이 이들에게는 중요한데 남을 위해서 발벗고 나서지는 않는다 나는 홍콩에 돈을 벌러왔고 그게 가장 중여하기 깨문에 그걸 침해하는 선의는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는다. 그럼 너 나좀 도와줄래? 그러지 뭐. 너 방에 침대 하나 남지? 이 사람이 지금 한 푼도 없어서 잘곳이 없는데 재워줄래? 그러지 뭐. 너 이번 수입물건 가져가는 컨테이너에 비는 자리 있지? 내 고향에 보낼 물건 틈틈이 좀 쑤셔넣어줄래? 그러지 뭐. 하여튼 이런 일들의 연속이다. 이런 일의 대부분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딱히 줄 생각도 없다. 내가 선의를 베푼 사람이 내게 선의의 대가를 지불하기를 기대하지 않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독히 느슨한 선의의 순환이랄까? 그 순환이 홍콩에서 살아가는 탄자니아인들이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비결이다. 오늘날에는 발달된 인터넷 통신망덕분에 이런 연결은 더 쉬워지기도 한다.
저자는 세련된 자본주의 국가 출신답게 이들의 이런 문화와 결합한 인터넷 연결망을 정비한다면 더 사업이 잘되지 않을까라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아마존이나 우리나라 쿠팡같은 시스템 말이다
그들의 연결망은 어수선하고 구매자와 판매자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니 단순하고 깔끔하게 아마존식으로 그러니까 좋아요 시스템으로 무장한다면 신용을 확보하기도 더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카라마는 부정적이다. 그는 자신이 주도하는 자유로운 사업가가 되고싶은거지 누군가의 노동자가 되거나 종속된 피고용자가 되고싶은게 아니기 때문이다. 홍콩에 온 대부분의 탄자니아인들이 마찬가지다.
결국 일본인인 저자와 탄자니아인인 카라마 사이에는 같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삶의 원리와 중요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신기한 공동체에 대해 작가는 어쩌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경제의 모습을 찾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유경제의 원리와의 접목이라든지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을테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리로 만들어놓은 우리의 감성 - 내가 너에게 이만큼의 선의를 베풀면 너는 나에게 그만큼을 돌려줘야 해라는 - 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되늨것만큼은 분명하다.
어디서나 히치하이크가 가능하던 2, 30년전의 대한민국과 대부분의 곳에서 모르는 사람의 히치하이크를 꿈도 꾸지 않는 대한민국의 간극이 이토록 커진 것은 결국 근원을 따지자면 자본주의가 있을테니 말이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