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초원의 작가 클레어 키건
어느 이방인에게든 아일랜드는 척박한 땅을 버텨낸 한 그루 나무같이 보일 것이다. 줄기와 잎은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생멸하기를 거듭했고, 그 틈에 뿌리는 소리 없이 썩어버릴 지경이었다.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1968~)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 공화국의 역사를 미시적 시선으로 관찰한 작가다. 그의 문학은 개인의 삶과 사회의 뿌리로 향한다. 사회의 폐해를 개인의 불안한 눈으로 관찰하면서 조금씩 들춰내면서 두려운 심정으로 저항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 저항이 촉발한 어떤 불가피한 슬픔을 문학으로 애도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그 내용은 대체로 사회 안에서 타인으로부터 변방으로 내몰린 어떤 사람들을 주목하며 그들이 이 세계 속에 조화로운 인간으로 당당하게 재정위 되기를 희구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서는 ‘비틀거리면서도 정의의 길로 걸어가도록’ 격려하는 희망의 소리가, 낮지만 옹골차게 들려온다.
그는 과작의 작가다. 하지만 기법과 형식은 다분히 치밀하게 문학적(紋學的)이다. 선명한 단어와 간결한 문장, 생생한 묘사, 함축적 은유를 통해 내면과 실제 현상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시적 소설의 면모가 뚜렷하다. 김도영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다.”(「유레카」, 제484호, 2024.3)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서술구조는 전반적으로 절정, 파국, 전환적 사건이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이야기가 고요한 강처럼 흘러간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아주 사소하지 않은 중의적 힘
최근작(2021)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하. 『이처럼』)은 그의 문학적 특징이 도드라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에서 저자는 개인의 ‘내면 성숙’ 여정에 천착하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막달레나 세탁소’ 같은 역사적 사건이 주요 소재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이 폐해를 바라보는 등장인물의 ‘내면 성장’에 주목한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내적 태도와 삶의 방식의 그의 주된 관심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 폐해를 알면서도 방관하고 묵인하는 자세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방관’과 ‘묵인’은 대체로 선택적 정의에 잇대어 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어느 사회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 점에서 사소하고, 미시적이며, 평범한 태도다. 하지만 『이처럼』의 압권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역설적으로 굳어진 삶을 균열 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삶을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찰은 저자가 구사하는 주된 소설적 전략에서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장르와 두 개의 도입구, 제목의 중의적(double entendre) 기법이다.
먼저 장르 면에서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연상시킨다. 일종의 ‘관찰일기’인 것이다. 본래 일기란 개인과 사회의 사건을 ‘그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개인의 삶’으로 표현하는 데 최적화된 장르이다. 개인적이며, 회고의 성격이 짙다. 작가의 시선은 주인공을 뒤따라 관찰할 뿐 과도하게 ‘간섭하거나’ 길게 ‘평가하지’ 않는다. 이처럼 주인공을 뒤따르는 관찰 태도는 역설적으로 주인공의 내면에서 보이지 않게 위협하는 무력(武力)이 주인공을 얼마나 무력(無力)하게 하는지 전면에 드러낸다.
다음으로, 『이처럼』에서 도입구는 두 곳이다. 하나는 책의 서문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첫 단락에 있다. 하나는 서문에 인용된 글이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선언문 일부다. “공화국은…….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이 인용문에는 이 소설의 대립 주제가 암시되어있다. 다른 하나는 소설의 첫 단락이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복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11면).
얼핏 보아도 작가는 이 도입구에서 동사들을 연속시킨다. 이런 기법은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끝으로, 제목에 사용된 중의적 기법이다. 이 소설의 제목에 쓰인 핵심 용어인 ‘사소한 것들(small things)’은 그 기능에서 중의적이다. 다른 의미로는 야누스(Janus)에 가깝다, 한편으로, 이 말은 사회적 비법이 횡행한 원인으로 작동한다. 즉 ‘사소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묵인해버리는 절망적 삶의 태도를 은유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비법 행위를 깨뜨릴 희망의 힘으로 기능한다. 특히 이 긍정의 의미로서 그 힘은 ‘과거 환대’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과거 ‘누군가로부터 환대받은 사소한 기억’이 오늘날 거대한 사회적으로 암묵 된 범법에 저항할 수 있다고 긍정한다. 이 환대는 친절함이면서도 타인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함의한다. 저자는 주인공의 환대 기억을 이렇게 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는지를 생각했다. 그것이 한 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120면)
이 글 속에 주인공의 과거 ‘사소한’ 기억은 곧 현재 저항의 토대라는 저자의 논지가 선명하다. 이처럼 키건의 소설은 얼핏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고요한 서술로 그 ‘사소한 것들’의 힘을 극대화한다. 저자는 이렇게 호소한다. ‘과거 역사가 현재를 견인한다. 환대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전진할 수 있는 대동력이다’.
과거가 현재를 견인하다는 사소하면서 거대한 문학의 진실-인간다움
이 소설에서 작가가 의도한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추론하자면 이렇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사소한 것은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내면에 굳어진다. 무시되어 사장되기도 하고 살아있어 떠오르기도 한다. 사소한 것은 인간의 내면을 균열하거나 건강하게 하는 야뉴스(Janus) 같은 바이러스다. 사소한 것들은 균열을 일으킨다. 그 균열과정은 자기 내면으로 재유입된다. 이 균열은 불가피하게 점차 사회의 방관과 묵인과 충돌한다.
한편, 이 소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개인이 묵인하고, 지나쳐버린 ‘사소한 것들’이 사회의 뿌리를 썩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눈 덮인 듯 평화로운 세계를 ‘도량발호(跳梁跋扈)’하듯 휘젓고, 데퉁궂게 하여 삶의 근원을 소리 없이 흔드는 것은 작은 ‘여우’(히브리 성경 아가서 2:15) 같은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 큰 위협을 깨는 것도 ‘사소한 것들’이라는 역설이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사소한 것은 숨어있는 선과 악의 추동력이다. 평범한 사람을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선택의 무게를 지게 한다. 그러나 확신해야 한다. 사소한 것이 일으키는 이 격랑은 끝내 희망으로 끝난다. 사소한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것은 ‘고요한 투쟁력’으로 강화된다. 돌이켜보면, 인간의 삶에서 사소한 환대로부터 추동된 기억의 힘은 사회의 어떤 위악보다 강할 수 있다. 이 사소한 것으로 인해 그 감춰져 있는 견고한 인습, 굳어진 악이 깨지고 선이 창화할 수 있다. 그 균열한 선 사이로 악이 창궐하기도 하고 악 사이로 선이 창발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 선의 끝에 인간다움이 있다. 이 소설은 국가와 사회에서 ‘인간다움(humanitas)’을 재차 일깨운다.
이 ‘인간다움’은 ‘사소한 것들’이 발원하는 고요한 투쟁력의 실체다. 그 분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인간다움’에 관해 김기현은 ‘공감, 이성, 자유’라는 조건을 제시한다(『인간다움: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 21세기북스, 2023). 그런 조건 하에서 유지되는 인간다움으로 이 세계는 선(善)으로 견고해지고 따뜻해진다. 인간다움이 주는 평화는 개인의 내면적 안위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외피적 정의로움이 잇대어 있다.
신학적 견지에서도 인간다움은 한편으로 인간에게 내재된 신의 형상(Imago Dei)을 인정하고 그것을 함께 구현하려는 영성과 관련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다움은 신이 허락한 공의와 정의, 헤세드(hesed, 환대와 친절)라는 삶의 질서를 함께 실현한다. 사회적-인간적 샬롬(Social- human Shalom)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행위로 견인된다(샬롬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의 조화로운 질서를 함의한다.). 물론 이러한 인간다움이 한 개인의 삶에 스며든다 해도 삶은 여전히 요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순항한다.
‘이처럼 사소한’ 문학이 우리 사회에 말하는 것
우선, 이 소설은 오늘날 개인의 관점에서 국가 또는 사회가 무엇인가를 구체화하게 돕는다. 이 책은 국가나 사회가 가진 폭력성을 고발한 톨스토이의 길과 나란히 걷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국가는 폭력이다.-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N. 톨스토이, 조윤정 역(서울:달팽이, 2008)]에서 국가가 ‘폭력’이라는 ‘강제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톨스토이의 관심은 ‘국가의 강제권력’에 대한 국민의 대안적 태도이다. 그의 답은 ‘저항’이다. 그런데 그 저항은 ‘폭력을 제압하는 또 다른 폭력의 재순환’이 아니다. ‘그 폭력의 끊어냄’을 위한 비폭력이다. 그가 제안한 유일한 저항은 평화 행동이다. 톨스토이는 '불가항력적인 국가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러면서 그 국가의 삶에 방관하거나 묵인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스스로 자유하라고 호소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는 견제의 대상이다. 맹목적 추종은 금물이다. 국가의 폭력을 방관, 묵인하는 행위는 올바른 종교적 삶과도 거리가 있다. 최악의 국가는 국민 본연의 인간적 양심에 마음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악이나 비합리적 종교를 조종하는 체제이다. 그 국가를 내버려 두며 그것에 조종당하는 경우가 최악의 정치이며, 국민이다.
2024년 12월 3일 ‘평화로움’의 정원에 느닷없이 폭탄이 떨어진 한국 사회를 생각한다. 이후 국가의 악이 최고조에 이른 치졸한 통치자의 시대를 힘겹게 지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이 소설을 통해 몇 가지 다짐도 새롭게 해본다. 첫째, 사회의 정의가 유지되는 주체를 반성한다. 민주 국가의 주체는 환대하는 인간이다. 법 너머를 조망하며 인간을 겸손하게 존중하는 땅의 권력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나의 ‘사소한 것들’을 성찰한다. ‘작은 것들을 위한 노래’가 계속 불려야 하는 이유다. 끝으로 세계의 인간다움은 결국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는 부드러운 저항, 작은 기억, 그 고요한 투쟁력을 계속 충전해야겠다. 개인과 사회가 기억하는 사소한 환대가 정의의 힘으로 발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다. 과거 사소한 환대라도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전진할 수 있는 대동력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늘 일깨워야겠다.
그렇게 새해에는 더욱 이 세계의 무질서한 범법을 방관하지 않기로 하자. 나의 삶의 사소한 환대 기억을 민감하게 되살려내자. 이 험한 세계에서 기꺼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보자. 나의 사소한 것들로 흔들린다 해도 나를 조련하여 정의의 길로 걸어가 보자. 그리하여 누구나 국가와 사회, 자기 삶에서 견고한 질서, 인간다움, 평화로움을 함께 누려보자. 무엇보다 개인과 사회가 기억하는 사소한 환대가 정의의 힘으로 발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환대는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결국 사회적 평화로움, 정의로움을 되찾는 기억 저항으로 크게 작동할 수 있다는 격려를 붙잡자. 소설가 한강의 선언은 옳다. “과거 역사가 현재를 견인한다.” 키건도 같은 심정으로 호소한다. 아울러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삶의 뿌리가 다시 견실해지길 기대한다. 계절이 되돌아올 때마다 마른 잎 살아나듯 되살아나 개인의 안녕과 사회-인간적 샬롬, 인간다움이 유지되길 소망한다.
[이 글 원본은 <교수신문 25.1.31자 인터넷판에 원본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