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동안, 퇴근하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한 시간씩 소설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온전한 독서의 시간은 아니었다. 도서관은 조용했지만, 소설을 읽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보다는 교과서를 읽는 기분에 가까웠고, 그런 기분이 나를 빨리 지치게 했다. 장소의 문제였을까. 오늘은 집에 일찍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방에서 조용히 소설을 읽었다.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를 읽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이 소설과 이별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는데, 오늘 ˝한정희와 나˝가 그랬다. 나는 때로 소설에서 문자 그대로 ˝구원˝ 받는다. 6년 전, 본격적으로 밀어닥치는 사회생활, 그리고 인간관계에 지쳤을 때, 조경란의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을 읽고 치유 되는 것 같았고, 바로 작년, 돌파구가 없다고 느끼던 생활에서도,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의 테두리가 따듯해지는 기운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은 ˝구원˝이라는 독서의 효능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의 다음 문장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만약 내 상황이 6년 전, 혹은 1년 전과 비슷했다면 이 소설이 마음을 예리하게 파고들었을 것 같다. 나는 이 기분을 간직하기 위해 뭔가를 글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다. 이 소설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렇게 써두었으니 다행이다. 소설의 줄거리와 인물,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며칠 지나지 않아 불완전하게 기억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더라도, 지금의 기분만큼은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