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스티커의 기원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를 놀리거나 욕하는 문구를 적은 종이를 등에 붙이는 악의적인 장난에서 영감을 받은 걸 수도 있다. '바보', '멍청이' 같은 단어가 등에 붙은 걸 발견한 상대가 폭발하면 '장난이었어. 왜 그렇게 화를 내?' 하며 변명하는 폭력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니까. 사실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내 알 바 아니고, 처음 보는 저주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양한 이유로 싫었지만, 그게 꼭 저주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은 어차피 기후 이변 문제 하나만으로도 종말의 길을 착실히 걷고 있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인공지능 같은 기술 문제도 있으니 그냥 둬도 곧 멸망할 것 같았다. p.27
어렸을 때, 유치한 장난이지만 친구 등에다 놀릴만한 문구를 써서 붙여놓고 깔깔대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 장난 같은건가? 김선미 작가의 '스티커'를 읽은 뒤 '비스킷'을 읽었다. '비스킷'이 시기상으로 먼저 나온 책이라, 이 책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김선미 작가는, 약간 뭐랄까, 기후 위기나 자연현상과 재해 같은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작가의 기본 성향 또는 지향점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선만큼이나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애정이 묻어난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그리고 사회에 나왔을 때 겪게 될 현실에 대해 걱정은 했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냥 내 아이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별 탈 없이 살아내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청소년들의 고민을 잘 짚어 낸다. 그것을 '스티커'라는 징벌 개념의 저주를 통해 드러낸다. 다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해결책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러한 해결책은 '긍정적 에너지'가 아닌 '부정적 에너지'를 증가시킨다.
복수하고 싶다면 무덤을 두 개 파 놓으라는 말이 있다. 하나는 상대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무덤이라고 한다.p.63
"맞아.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주 스티커는 떨어져서 땅으로 스며들어 저주 스티커에 깃든 부정적인 에너지가 땅에 흡수되는 거지. 부정적인 에너지가 축적되다가 더 이상 땅이 품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거야. 작게는 진도가 낮은 지진이나 규모가 작은 해일이 일어나고, 크게는 산사태, 폭풍, 대형 산불, 진도가 큰 지진이 발생해."p.93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제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남을 배려하고, 약자를 도와주며, 기본을 지키는 사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런 사회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세상이기에 상대도 나와 같은 고통을 받아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주 스티커를 판매하는 주인공은 요마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다. 우연히 손에 넣은 저주스티커 제작 도구로 소소하게 용돈을 벌고 있는 셈이다.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도와달라고 외치지 않아서 그래. 요즘 사람들은 섣부르게 나서려고 하지 않거든. 도움받을 일이 생기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특정해서 도와달라고 해야 해. 거기 안경 쓴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병실을 방문한 경찰이 설명했다. 도움을 받을 때도 지침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서 도움받지 못한거라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오히려 동물이 인간보다 더 나은 게 아닐까. p.54
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세상과 맞닥뜨릴 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때 무기력함을 느낀다. 도움을 받을 때도, 누군가를 콕 집어서 요청해야한다는 게, 피해자 입장에서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당연히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보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 상황에서, 주술적인 '저주'라는 것, 그러니까 사적인 제재이면서 익명을 보장할 수 있는 징벌의 방법이 있다면 솔깃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마도 알고 있다. 가해자에게 똑같은 방법 혹은 상응하는 방법으로 벌을 주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을. 다만,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마더 옳지 않다고 가볍게 치부할 생각"(p.105)도 없다.
책에서는 요마의 반대편에서 저주스티커를 떼고 다니는 '소우주'라는 아이가 나온다. 소우주의 가족들은 저주스티커를 제거하는 일을 한다. 소우주를 통해 저주가 아닌 스스로 강해짐으로써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딪쳐야지. 부딪쳐도 깨지지 않도록 널 단단하게 만들어야지. 지금은 이 아이가 입김만 불어도 날아가게 생겼잖아. 네가 널 지켜 줘. 땅에 딛고 선 두 다리에 힘주고 눈에도, 가슴에도, 손가락에도 힘을 빡 주고 계속 널 지켜 내는 거야. 널 욕하고, 때리고,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게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야. 처음에는 힘들 수 있어. 하지만 갈수록 나아질 거야. 약속해. 오늘부터 널 지켜 내는 연습을 하면 시간이 지나 네 앞에 어떤 멍청이가 나타나도 너는 깨지지 않을 수 있어."
아, 그렇구나. 지켜 줘야 하는 거였구나. 마음이 부서지려고 할 때, 나쁜 마음이 날 잡아먹으려고 할 때, 내가 날 지켜줘야 했구나. 내가 날 지켜 주지 못해서 나는 저주 스티커를 만들었던 거구나.p.204
스스로 강해지라고 하는 말은, 전작에 등장했던 '무너져 내리고 스스로 비스킷이 되어 버린 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지만, 그때 곁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혼자가 아니기에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주 스티커를 주문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싶은 순간들이 쌓여 오히려 나를 망쳐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책에서는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지켜내야한다고 말하면서, 소우주와 다른 주변 인물들을 통해 곁에서 너의 편이 되어 힘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청소년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