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제목이 주는 묘한 끌림과 '책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입만 했을 뿐, 다른 책들에게 밀려 계속 책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 책을 어서 해방시켜야겠다는 마음에 독서 동아리에서 읽을 책으로 추천을 했다.
내가 속한 독서 동아리는, 회원들이 추천한 책을 함께 읽는다. 오로지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그리고 자기만의 취향에 따라. 그러다 보면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이나 절대 손에 잡지 않았을 책도 읽게 되고 의외의 발견도 하게 된다.
독서 취향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기준'이 명확하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줄 세워 놓은 필독서가 나에게는 아무 재미를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겠다.
독서동아리 선생님들과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5명의 취향이 때로는 이쪽 저쪽으로 튀기도 하지만, 가끔은 한 방향을 보기도 한다. 내가 몰랐던 다른 책의 세계, 그러니까 저자가 말한 것처럼 평생을 읽다 죽어도 다 못 읽을 그 책들을 적어도 5배는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내가 처음으로 책과 관계를 맺은 것은 나 자신의 존재와 삶, 그리고 이 세계를 둘러싼 온갖 의혹을 풀어보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독서 행위 자체가 주는 재미와 기쁨, 그리고 행복을 위해 책을 읽는다."(p.10-11)
나는 저자처럼 멋있게 나의 독서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어린 시절의 독서는 세상과 만나는 길이었다. 독서하는 시간은 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시간들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나를 기대했다. 그 기대가 와장창 깨진 것은 대학생 때였는데, 내 독서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친구의 눈길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짧은 생을 살다 간 그 친구는 그 나름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봤던 것이니... 그게 상처가 되어 내게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유일한 내 휴식과 쉼의 시간을 채워주는 개인적 취향 때문이기도 하고, 번잡스러운 현실에서 눈 감고 귀 닫는 길이기도 해서다. ---> 한 번 더 고민해 봐야겠다. 나는 왜 이런 이유로 책 속으로 파고드는지.
책으로 읽기보다 연극으로 봐야 제맛을 알 수 있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p.30)를 나는 연극으로 두 번을 봤다. 책을 읽은 기억은... 음 없는 것 같다. 대학생 때 인문대학 안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학도들 사이에서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소설 하나쯤은 입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쉽사리 책을 펼쳐보지 못했던 것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 것이다.
처음 연극을 봤을 때, 나는 멍해서 나왔다. ---> 왜 인지는 짐작하리라.
두 번째 연극을 본 것은 얼마 전이다. 내가 나이가 든 때문일 수도 있겠고, 수십 년 연기 내공이 쌓인 노배우들의 연기로 보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책을 해석하기보다 책에서 자신의 고민을 발견하기(p.38)
우리는 여태 책을 해석하는 일을 해왔고, 그 해석의 정답을 정해놓고 얼마나 잘 맞추냐를 평가해왔다. 그러니, 책이 재미있을 리 없고, 읽고 싶을 리 없다. 수많은 도서 목록보다는 나의 취향에 맞는 책을 선호한다. --->이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닌듯하다만...
마치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가 클릭하는 영상과 비슷한 것만 보여주듯, 온라인 서점의 추천 마법사는 내가 산 책과 비슷한 책을 자꾸 보여준다. 안다. 나는 또 지갑을 열 것이라는 것을.
"더욱이 한가롭게 고전만 파고들 경우, 당대의 과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고전 독서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 자신이 '지금 현재' 상황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개인적인 관심과 문제의식, 나아가 당대가 제기하는 문제와 대결하기 위한 사유의 연장에서 자신에게 필요할 때 찾아 읽어야 한다. 취향이 너무나 고전적이라 고전이 자신의 영혼에 딱 맞는 옷이라면 고전만 찾아 읽어도 된다."(p.40)
고전만 그러한 건 아니다. 그러나 고전만큼 오해를 받고 있는 책이 또 있을까? 고전 한 두 권쯤 읊어댈 수 있어야 책 좀 읽은 사람 티가 난다. 하지만 그 고전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고전이어서가 아니라, 그 책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그것이 재미든, 지식이든 간에)을 발견할 수 없다면 굳이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 지금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들, 알고 싶은 것들, 즐기고 싶은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독서로 즐거움을 얻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하기를 원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야말로 모든 독서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독서가 주는 순수한 기쁨과 재미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이 자기 자신과 삶,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인식의 쾌락과 연결될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얻는다. 독서에서 재미와 인식은 분리 불가능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p.43)
"한 권의 책만으로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듯한 은근한 지적인 만족감을 주고 동시에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이나 모험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긴장과 서스펜스와 때로는 코믹한 즐거움도 주기 때문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 관심을 가졌거나 좋아하는 작가들과 책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훔쳐보는 쏠쏠한 재미에 더해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게 되는 장점도 있다. 이런 모든 정보들은, 독서 감상문을 쓰거나 책에 관한 글을 쓸 때 아주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된다."(P.124)
"그럼에도 요즘도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다 밑줄을 긋고 싶어 펜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안절부절못할 때가 많다.
사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습관은 고질병과 비슷하여 생각보다 고치기가 힘들다. '참아야지, 참아야 하느니라!'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지만, 끝내 밑줄을 긋고 싶은 욕망에 굴복하고 말 때도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책에 밑줄을 긋고 싶어 할까? 밑줄을 긋는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참고서에 빨간 볼펜, 파란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 시작한 게 기원일 듯싶다.(p.163-164)
사실, 나도 밑줄 그으면서 낙서하면서 책을 읽는 편이라,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 또 프래그 같은 걸 붙이는 것도 내게는 잘 맞지 않다. 그거 붙이고 있는 행위 자체가 내게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처럼 느껴져서이다. 그래서 나는 책에 밑줄을 긋는다. 빌리지 않고 사서 보는 책이 많은 이유도, 그 많은 책을 헌책방이나 중고로 팔아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는, 줄 긋지 않은 책(필시 읽지 않았던 책일 확률이 높다)을 온라인 중고서점에 내다 팔았다. 나머지 수천 권의 책은 종이쓰레기로 버려졌다.
버리면서도 이번에는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사야 할 책을 조금 더 신중하게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읽은 책은 그들이 소개하는 책 중에 1%도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만큼 많은 책이 있고, 그만큼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을 읽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이 책을 덮으면서, [역시 사 놓았지만 읽지 않은 '돈키호테']를 마음 먹고 읽을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