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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BOOK적 BOOK적한 나날들
교토는 일본 천년의 고도로 가장 일본적인 특색을 지닌 도시라고 한다. 그런데 교토 답사기를 읽다보니 교토가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에 의해 일구어진 도시라는 걸 일본의 학자들도 인정하고 도래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경의를 보인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 이전에 교토에 세워진 도래인 신사들을 보면 덩서남북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데, 도래인들이 개척한 곳을 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점이 있었다.
신라계의 하타씨는 가쓰라 강변의 습지에 마쓰오 신사를, 고구려계의 야사카씨는 히가시야마의 산자락에 야사카신사를, 백제계의 아야씨는 아스카들판에 아스카사를 지었다. 삼국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아스카나 야사카 라는 말에는 안식처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역시나 자기 고향마을 같은 풍경에 안식을 느끼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이주하여 힘든 삶을 극복하고 문화를 창출해낸 그들이 새삼 위대해보인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나와서 인상깊었던 후시미 이나리 신사도 가장 일본적인 색채를 띤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신사를 세운 것도 신라계의 도래인 하타씨였다.
물론 신라계 도래인이 세웠다고 해서 한국문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타씨가 일본의 자연과 역사에 적응해가면서 일군 문화니까 당연히 일본에서 전형적인 일본문화지만 그 시작이 신라계였다니 또 다른 감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간 김에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웠다는 고려사터를 다녀오는데, 사실 폐사지라는 것이 절이 있던 흔적만 있는 곳이니 답사라고 해봐야 빈 터에 서서 사방 풍광을 보고 느끼는 것 뿐이다. 그런데 2013년 답사때 가보니 감나무 두 그루가 서있었다 한다.
나는 잘 몰랐는데 감나무는 유적지와 잘 어울린다고 한다. 문화재를 발굴할 때 감나무가 있나 없나를 먼저 살펴보는데 감나무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았다는 징표라고 한다. 사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직접 체험한 것은 없지만 책이나 드라마에서 주워들은 것만봐도 우리의 삶에서 감나무와 관련된 추억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유홍준 교수는 일본 땅에서 밟은 고려사터의 감나무에 감동하여 얼른 감나무에 기어올라가 감을 따서 답사객들과 나눠 먹었는데 한참 따다 보니 다른 나무에도 친구가 올라가 감을 따고 있었단다. 한바탕 감따기를 하고 나자 어떤 분이 점잖은 체면에 그렇게 감서리를 해서 되겠느냐고 지청구를 주었는데, 그 때 그 친구분이 ˝이런 감나무를 보고도 올라갈 생각을 안한다면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정서에 문제가 있다˝고 역공을 폈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그 때의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해서 웃음도 낫지만 그렇게 감나무를 보면 추억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면서 이런 정서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나무에서 감을 따먹던 추억은 없지만 쌍문동 골목길을 누비던 애들처럼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엄마가 부르면 들어가곤 했던 추억들이 있다. 그런 추억들이 모여 정서가 되고 문화가 될텐데.. 우리 아이들에겐 돌이켜 기억해볼 어떤 추억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 하는 답사팀이 부러운 이유 또 하나.
답사단이 모두 제각각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이다보니 각각의 시선으로 문화재를 바라보는데, 원욱스님은 고려사터에서 일반인들과는 또 다르게 그 처연한 아픔을 먼저 받아들이는 면이 있었다. 절터를 향해 합장을 하고 법성계를 독송하셨다.
일문과 오찬욱 교수는 고려사터 한쪽 풀숲에 묻혀있는 허름한 시비를 다 읽어냈다고 좋아하시며 일행에게 소개해 주시는데 그 시의 내용이 압권이다.


지나가는 이여

마음속에 기려보렴

먼먼 옛날에

이 길을 열어온

고구려인의 발자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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