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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山草堂

사랑한 후에도 오지 않는 것들

 

불우한 시대만큼이나 고혹적이었던 작가사진으로 인해 사들게 된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난 ‘박제된 고통’을 느끼며 읽었다. 90년대 초반은 김광석, 동물원, 안치환, 이문열 그리고 공지영으로 점철된 내 개인사가 가로 놓여져 있다.

 

혹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는 공지영의 “정체성”은 결국 지루함이라는  지난한 명제로 구태의연한 일상에 파묻히게 해주었다.

 

대학의 한 시기를 달뜨게 만들어 주었다는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난 21세기로 넘어간 그 어느 시기까지도 공지영의 소설을 세금 내듯이 읽었다. 물론 10년 가까운 미련이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난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그의 소설을 더 이상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일종의 난독증이었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 속에는 공지영은 그녀의 말처럼 "박제된" 소설가가 되었다.

 

애초에 공지영의 소설에는 내가 기대한 ‘시대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소설가로써 충실했을 뿐이고 난 그저 마취약에 취한 ‘독자’였을 것이다. 소설은 늘 소설이었지만 내가 그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마취에서 깨어난 현실 속에서 공지영의 소설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의 소설은 오로지 소설이기에 그 과장된 ‘사랑’의 표현 들은 내가 지나온 과거 들이 온통 쓰레기 통에 쳐 박히는 느낌이다.

 

공지영의 소설부터 시작하는 게 맞았다. 공지영부터 시작해서 츠지 히토나리로 끝내는 게 맞았는데. 후회 막급이다. 아니면 아예 소설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아도취의 경계를 오가는 나르시즘에 배반당했다고 우기는 내 말을 공지영이 듣는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베니(혹은 홍)의 Cool 함을 배반한 공지영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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