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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완독. 각각의 책들의 읽은 정도를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iReaditNow’ 앱에는 10월 2일부터 읽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난 일기들에 작성을 안 해놓은 것을 보니 작성하는 것을 빼먹은 모양이다… 영국의 학교 현장, 지역 공동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문제, 계급 문제를 이제 막 아들을 중학교에 보낸 학부모의 입장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풀어낸 글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유럽이나 여기나 학교와 마을 공동체가 겪는 문제들은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을 첫 번째로 했고(적나라하게 말하면 ‘여기도 우리처럼 난장판이네.’라는 생각. 이는 드라마 「소년의 시간」 2화를 보았을 때도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영국이군..), 그럼에도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시민 사회의, 민주주의의 경험이 우리보다 더 길기 때문일까. 특히 시민권 관련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심퍼시와 엠퍼시를 수업 시간에 논하고, 학교 안과 밖에서의 정치적인 문제를 가정에서 이야기하는 장면들. 다문화 사회를 먼저 맞이하고, 브렉시트를 거쳐가는 영국에서 한국의 현실을 돌아본다. 범위를 좁혀서 학교 공동체를. 이미 도래한 문화 다양성의 문제를 아직도 오는 중이라고 착각하는 모습들을.


“노인은 모든 것을 믿는다. 중년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 청년은 모든 것을 안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지만, 여기에 “아이들은 모든 것에 직접 부딪친다."라고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의 학교는 어디부터 손대면 될지 아득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런 학교생활에 맨몸으로 부딪치는 아이들의 무모해 보이는 용기는, 외려 세태에 찌든 어른들에게 커다란 힘을 북돋워준다. (정작 본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겠지만.) (11-12)


이런 풍조 탓에 오늘날 영국의 지방 도시에서는 '다양성격차'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종의 다양성이 있으면 우수하고 부유한 학교'라는 기묘한 구도가 생긴 것이다. '구 밑바닥 중학교' 같은 곳은 얼핏 보면 백인 영국인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견학 행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거의 다 백인이더라.” 하고 툭 내뱉기도 했다. (26)


대처 정권은 공영주택을 판매하며 “주민에게 구입할 권리를 부여한다."라고 했다. 그때 집을 구입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다. 집을 구입한 사람들 중에는 계속해서 그 집에 거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을 팔고 이사를 간 사람도 있다. 그렇게 영국의 공영주택지 내에 '얼룩덜룩 현상'이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구 공영주택을 부동산에서 민간주택으로 구입하여 살고 있는 주민과 (대처 시대 이후 몇 번씩 주인이 바뀐 집도 있다.) 지금까지도 지방자치단체에 집세를 내고 있는 공영주택의 주민이 한 동네에 얼룩덜룩하게 섞여서 공존하게 된 것이다. 후자는 지금도 자신들이 “공영주택지에서 산다."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영국의 공영주택지에는 대부분 '구'를 붙여야 한다. (49)


노동당이 집권했던 2000년대에 '차브chav'라는 용어가 생겨나 영국에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차브를 “무례하고 상스러운 언동이 특징인 하층 계급의 젊은이"라고 정의하지만,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 공영단지 같은 곳에 거주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처음에는 BBC나 전국지에서도 망설임 없이 썼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논쟁의 여지 없는 차별 용어로 문제시되고 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패션과 생태를 일반화하여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라며 문제의 용어를 쓰지 않으려 하는데, 실제로 그들 곁에서 살며 겉모습이나 생활상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양성이 풍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단언하지만,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을 기준으로 폭탄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차브라는 단어를 회피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근원은 현실적인 빈곤에 있기 때문이다. (51)


“자신만이 정의라고 집단으로 믿어버리면, 인간은 미쳐버리거든." (59)

어느 한쪽을 고르라든가 그중 하나를 내세우라며 서로 옥신각신하는 세상이 된 건 분명하다. 저기 축구장에도 동유럽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 몇 대를 거스르면 인도계 선조가 있는 아이, 아일랜드인의 아이 등이 분명 있을 것이다. 유복한 집의 아이도, 그렇지 않은 아이도, 양친이 모두 있는 아이도, 싱글맘이나 싱글파더의 아이도 있을 것이다.

분단이란,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타인에게 덮어씌운 다음 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골라 자신에게 둘렀을 때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75)


키 스테이지 3에서는 의회제 민주주의와 자유의 개념, 정당의 역할, 법의 본질과 사법제도, 시민활동, 예산의 중요성 등을 배우는 모양인데, 이렇게 정치적인 사안을 어떻게 열한 살짜리 꼬맹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일까.

"시험에는 어떤 문제들이 나왔어?"

내 물음에 아들이 알려주었다.

"엄청 간단해. 기말시험의 첫 번째 문제는 '엠퍼시empathy란 무엇인가?'였어. 그다음은 '아동의 권리를 세 가지 적으시오'였고. 전부 쉬운 문제들이라 누워서 떡 먹기처럼 백점 받았어."

자신만만해하는 아들 옆에서 배우자가 말했다.

"그게 뭐야. 갑자기 엠퍼시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한마디도 못할걸. 그거 엄청 심오하다고 할까, 어렵지 않냐? 너는 뭐라고 답을 적었는데?"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란 영어에서 쓰이는 관용적 표현으로 타인의 입장에 서본다는 뜻이다. 엠퍼시는 흔히 '공감', '감정이입, '자기이입' 등으로 번역되는데, 확실히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84-85)


옥스퍼드 영영사전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심퍼시는 다음처럼 정의되어 있다.


1.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 누군가의 문제를 이해하여 걱정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

2. 어떤 사상, 이념, 조직 등에 대해 지지하거나 동의하는 행위.

3.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


한편 엠퍼시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


결국 심퍼시는 '감정' 또는 '행위' 또는 '이해'지만, 엠퍼시는 '능력'인 것이다. 전자는 평범하게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케임브리지 영영사전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엠퍼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타인의 입장이었다면 어떨지 상상함으로써 누군가의 감정이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능력.


즉 심퍼시는 가여운 사람이나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지닌 사람을 보며 품는 감정이기 때문에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하지만 엠퍼시는 다르다. 자신과 이념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 또는 그다지 가엾지는 않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상해보는 능력인 것이다. 심퍼시가 감정적 상태라면, 엠퍼시는 지적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86-87)


갓 부임한 일본인 기자가 '파키'라는 호칭이 무슨 뜻인지 혹시 금기시되는 말인지 그 영국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파키'란 '파키스탄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실제로는 파키스탄인뿐 아니라 인도와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출신자들, 그리고 겉모습이 닮은 중동 출신자들에게도 쓴다고 답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그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파키'가 흑인을 비하하는 '니거nigger'처럼 금기시되느냐면 그렇지는 않아요. 영국인은 그 말에 친밀한 감정을 담기도 하거든요."

“뭐라고!"

옆에서 여러 신문의 사설을 가위로 자르며 스크랩하던 나는 무의식중에 소리쳤다.

“그렇지는 않지. 그건 너무 난폭한 말이야."

"난폭하지 않아. 예를 들어 우리 집 앞에 파키스탄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이 있는데, 나와 친구들은 그 가게를 '파키 숍'이라고 불러. 딱히 차별하려는 건 아냐. 점원들하고도 친해진 단골가게라서 친숙하게 부르는 거라고."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며 '아, 그랬어. 이 녀석은 옥스브릿지를 졸업한 엘리트에 친구들과 셰어하우스에서 살고 있었지.' 하고 생각했다. 이런 젊은이들은 정말로 아무런 악의 없이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친애하는 감정을 담아 “파키”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파키'는 애초에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구 식민지 출신 이주민을 차별하려고 만든 부정적인 단어야."

"그렇긴 하지만 아주 오래전 1960년대의 이야기야.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의 용법도 바뀌었다고."

아니, 아니, 아니. 당신네 계급에게는 시간이 음속으로 나아가는지 모르겠는데, 하층 계급이 사는 마을에서는 아직도 1960년대랑 그리 다르지 않게 쓰일 때가 많답니다. 내심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나중에 탕비실에서 몰래 일본인 기자에게 일러주었다. (136-137)


"아까 시인지 뭔지 말할 때 자기 입으로 '자포자기하게 되었다.'라고 했잖아? 자포자기해서 '어차피 싫어할 거라면 너희들이 맘껏 싫어하게 해주겠어.' 이런 생각으로 올리는 거 아냐?"

배우자는 과자 봉지에 손을 넣어 땅콩을 찾으면서 계속 말했다.

“동정을 원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모두들 열 좀 받으라고 하는 거야. 하하하, 반항적이라서 좋네.”

웃고 있는 배우자에게 아들이 말했다.

“만약 그렇다 해도 반격하면, 그만큼 상처가 늘어나 반격하고 상처 입고, 또 그것 때문에 누굴 미워해서 반격하고 상처 입고, 또 미워해서 반격하고, 이런 일에 끝이 있긴 해?"

나는 '오, 뭔가 굉장히 심오한 일이 되었는걸.' 하고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은 반세기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난다. EU 탈퇴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영국에서는 탈퇴파가 많은 중장년층과 잔류파가 많은 10, 20대의 사고방식 차이가 계속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집에서도 마치 사회의 축소판 같은 대화가 펼쳐지는 것 아닌가.

EU에 반란을 일으킨 탈퇴파 세대를 향한 젊은 세대의 물음과 비슷한 아들의 질문에, '반역과 보복의 반복에 끝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배우자는 과연 어떻게 답할까?

숨죽이며 주목하는 우리에게 배우자가 한마디로 말했다. "나도 몰라." (235-236)
















『과학산문』 읽기 시작.


물리학자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을 찾아 세상을 잘게 쪼개어갑니다. 항상 우리 주변에 있었던 것들에서 예기치 못한 속성을 찾아내고 이유를 설명하죠. 필요하다면 대상을 부수거나 변형하며 완벽히 통제하고 제어하면서 실험합니다. 나아가 이렇게 알아낸 속성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인류 기술문명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문학자는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너무 멀리 있어 직접 가보기 어려운 세상을 다릅니다. 천문학자는 대상을 부수거나 변형할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쳐다볼 뿐입니다. 원한다면 마음대로 외부 세계를 바꾸는 물리학자와 달리 천문학자가 내면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요? (21)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문제를 관찰자와 관찰대상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관찰자가 관찰대상을 측정하면 대상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죠. 문제는 관찰자가 자신을 관찰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겁니다. 즉, 관찰자는 자신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두 존재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축구를 하려면 두 개의 팀이 있어야 하듯이요. 양자역학에서 내가 나를 관측한다면 관측하는 '나'와 관측당하는 '나'는 달라야 합니다. 논리학에서도 자기 자신을 다루면 큰 재앙이 일어납니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양자 세계, 논리 세계의 나르키소스는 자신과 다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23-24)


지금은 과학자들에 둘러싸여 과학계 종사자로 살고 있지만 저는 과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빗면 위에서 미끄러지는 나무토막의 가속운동 문제에서 단, 마찰은 무시한다고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마찰이 없는 경사면이니 빙판이니 하며 둘러대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걸. 입안의 혀도 때로 박자를 못 맞춰 깨물어가며 사는데, 우리의 어떤 움직임에 마찰이 없을 수 있을까요? 그림 속 나무토막의 중심점으로부터 아래로 또 옆으로, 두 개의 화살표를 그으며 문제 풀이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종이와 연필심 사이의 마찰 덕분인데 말입니다.

교과서 밖에서 살아가는 나는 옹이가 잔뜩 나고 결도 휘어진 나뭇조각처럼 이리 못나고 저리 불퉁해 세상에 부대끼며 허덕이는데, 책 속 나무토막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직육면체인데다 내부의 물질 분포가 균질해 마찰이라곤 고려할 필요도 없는 매끈한 내리막길에서 미끄럼을 타고 똑바로만 간다니요. 교과서는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눈앞의 명료한 현실도 제대로 모사하지 못하는 물리법칙으로 온 우주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8-29)


자연의 물리법칙에 대처하는 인간의 법칙은 이처럼 임시변통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미봉지책이 삶을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어 나를 구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4년에 한 번 나타나는 2월 29일이나 그보다 드물게 나타나 더 짧게 지속되는 23시 59분 60초처럼 느껴질 때, 그 작고 소중한 윤일과 윤초 덕분에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잘도 박자를 맞추며 살아갈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31)


이제는 저도 압니다. 과학은 무시할 것을 무시하고, 생략할 것을 생략함으로써 세상 만물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기틀을 세우고 초석을 닦는다는 것을. 상욱님과 제가 서로 다르게 갖고 있는 각자의 넓은 스펙트럼을 물리학자, 천문학자라는 누르개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직장 밖 사람들에게 이만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근사값의 근사함을, 이제는 압니다.

겉도 속도 이상적이지 않은 나를 더 못나 보이게 만들곤 하던 그 완벽한 나무토막을, 조금의 마찰도 없이 매끄럽기만한 빗면을 거침없이 내려오며 지구로 돌진하는 그의 가속운동을, 이제는 똑바로 응시하며 미소 지을 준비가 됐습니다. (34-35)



25.10.15.

『과학산문』 읽기. 은하 이야기를 하다가 면으로 차원을 낮추는 이야기를 읽으며 글에서도 면발에 대한 진지함이 느껴져 웃었고,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참기 힘든 고통을 견디며 기어코 해야 할 일을 해내는 모습에 뭉클해졌다. 저자의 말마따나 나는 언제 저렇게까지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았고, 앞으로는 나도 발레를 볼 때 사람이 보이겠구나, 동작 하나하나를 어떻게든 해낼 때의 고통이 보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면발이란, 씹을 때 국수 전분을 이루는 포도당의 글리코사이드 결합이 가벼운 반발력으로 치아에 뉴턴의 제3법칙에 따른 반작용력을 가하는 차가운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굵기 또한 중요한데, 면의 원통형 대칭이 살짝 깨진 상태로 그 두께의 변화가 예측 가능한 패턴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면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면의 길이는 한 번의 흡입으로는 입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두 번이면 완전히 사라지는 정도가 좋습니다. 하지만, 흡입의 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또한 가위로 면발을 난도질하는 것은 국수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1차원은 '길이'라는 단 하나의 물리량으로 그 존재가 규정됩니다. 면을 자르는 것은 1차원 구조가 가진 유일한 특성을 제멋대로 재단하여 면의 자존심을 꺾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편히 먹기 위해 근본을 버리는, 쉽게 말해서 UFO의 이상한 움직임을 이해하자고 물리학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41-42)


KBS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에 따르면 국수는 중국의 탕湯 문화와 서역의 빵 문화가 결합하여 탄생한 거랍니다. 서역에서 밀가루는 빵으로 만들어 구워먹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인은 뭐든 끓여먹길 좋아합니다. 밀가루를 끓여먹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국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밀가루에 국물 간이 잘 배도록 부피 대 표면적 비율을 최대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기하학적 구조가 바로 '1차원' 국수였던 겁니다. 차원 낮아지는 것은 싫지만, 차원을 낮추면 공간적으로 주변과 소통하는 능력이 늘어납니다. (44)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별은 반짝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빛은 입자여서 저멀리 별에서부터 출발한 빛 알갱이 몇 개가 우리의 각막에 와 닿는 것일까요, 아니면 빛은 파동이어서 저멀리의 별빛이 우리에게까지 전파되는 것일까요? 대기의 성분과 밀도와 움직임에 따라 별빛은 나름대로 직진합니다.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매 순간 가장 빠른 경로를 찾아서 곧장 앞으로 나아갑니다. 가장 빠른 길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면 별빛은 찰나마다의 가장 빠른 길을 따라 지표면상의 여기에도 닿고 저기에도 닿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을 때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별빛은 반짝이는 게 아니라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별은 오로지 우리가 보고 있어서,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찬란히 반짝입니다. (50-51)


저린 것과 쥐가 난 것은 다릅니다. 보통은 쥐가 나면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는 한참 전부터 종아리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에도 준비한 음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모든 동작을, 미소 짓는 것까지 잊지 않고, 완수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저렇게까지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밤새 공부를 해본 적도 있고, 이사 비용을 아끼려고 티브이도 세탁기도 그 금이 간 채로 아이를 안고 다닌 적도 있지만, 뭘 하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울면서까지 기어코 해야 할 일을 해내고야 말았던 적이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그 아이를 존경하게 되는 데에는 한 곡의 음악이 끝나는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52-53)


회전하는 발레리나는 각운동량을 잃지 않기 위해 발끝으로 섭니다. 바닥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서 마찰을 줄입니다. 회전하는 움직임에 따라 알맞게 팔을 오므렸다 폈다합니다. 회전하기 위한 중심축으로 삼은 다리는 꼿꼿하게 딛고, 다른 다리를 던지듯 뻗었다가 재빨리 감으면서 회전관성은 줄이고 각속도를 빠르게 합니다. 팔다리를 벌리면 느리게 돌고, 몸에 붙이면 계속해서 빨리 돌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어느 쪽이든 마찰 때문에 점점 느려집니다. 그럴 때는 내 몸의 일부를 과감히 던져야 합니다. 물론 다음 순간 재빨리 되가져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음악이 다 끝날 때까지, 있는 힘껏. (54)



25.10.17.

『과학산문』 읽기.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신이 없다는 증거를 보며 기뻐하는 사람은 아니길 바랍니다. 인간을 사랑해줄, 삶의 의미를 제시해줄 신이 없기 때문에, 이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별빛이 별빛답지 않은 시대, 인간에게는 인간이 필요합니다. (62)


사실 21세기에 제조된 자동차의 깜빡이 소리는 대개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입니다. 자동차에 전자제어 장치를 도입하는 등 많은 부분이 전자장치로 대체되어서 그렇습니다. 디지털 릴레이에서 기계적인 소리가 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운전자는 방향지시등이 켜져 있는지 여부를 인지해야 하므로 깜빡이 소리는 꼭 들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는 음원을 만들었습니다. 기계식 깜빡이 소리를 감쪽같이 재현해, 깜빡이를 켜면 박자에 맞춰 같은 소리가 나게 만들었죠. 요즘은 그에 더해 문을 열거나 시동을 켜고 끌 때 효과음을 내기도 합니다. 컴퓨터를 켤 때 나는 소리, 넷플릭스에 로그인할 때 나는 소리처럼 차의 시그널 음향을 만듭니다. 기분에 따라 음악 테마를 바꿀 수도 있겠죠.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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