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21.~27.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읽기. 하루에 3-40분 정도 한 챕터씩 최대한 맞춰 읽고자 노력함. 읽을 때마다 그때의 감상을 바로 쓰는 것이 일기에 좋을 텐데 보통은 직장에서 읽느라 적을 틈까지는 안 나기도 하고 점점 나태해진 탓에 감상을 적지 못했다. 미술관의 경비원(미술에 대한 식견을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쌓게 된)이 되어 작품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느낌은 어떤 걸까 생각하게 되는 글들. 여행하는 입장에선 오래 보고 싶은 마음과 이후의 (보통은 촉박한) 일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마지막엔 체력에 져서 후다닥 나오는 경우가 잦은데, 그랬던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교양에 대한 목마름이 오랜만에 다시 찾아오기도 했고.
25.4.28.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완독.
25.4.29.
『어떤 어른』 읽기. 길에서 잘 읽진 않지만 그래도 꼭 한 권은 가방에 넣고 다니려고 하는 편인데 출근이 촉박했음에도 오래 고민하다 고른 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을 때도 많은 감동을 받으며 글을 읽었지만 이번 책도 들어가는 글부터 눈길을 끄는 문장들이 많이 있었다. 책 속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의 천진함과 글이 주는 따뜻함을 느끼며 읽는 중. 그나저나 책은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 왜 이리 무겁냐...
「인간을 사랑합니까」를 읽다가 어떻게든 글쓴이의 의견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그 청중의 태도에서 종종 마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오며가며 보고 듣게 되는 어린이들의 순수하면서도 악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차별 문제에 의견이 나뉘지 않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른에 대한 답답함과, 어린이의 말과 행동이 모두 어른의 반영임을 알고 있어도 이해되지 않는 말과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던 나를 돌아볼 때의 마음이 뒤엉켜서 그런 듯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일화도 생각이 났다. 경비원을 깔보는 태도를 당당하게 아이 앞에서 드러내던 아버지의 모습. 그런 어른들에게서 배운 모습이 어린이 나름의 방식으로 발현되어 나타난 거겠지. 세상에는 비난과 비아냥이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는 줄 모르는 어른들이 참 많구나 탄식하며 마저 읽기로 한다.
25.5.1.
『어떤 어른』 읽기.
25.5.2.
『어떤 어른』 읽기. 「어린이가 미워질 때」라는 글을 읽다가 생각한 것.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그때 왜 그랬는지를 곰곰이 따져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사람이다. 한때 어떤 어린이를 미워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품고 있던 어린이에 대한 편견까지 생각해보는 글쓴이처럼.
그런데 나는 왜 그때 '못된 어린이 때문에 힘들다'도 아니고, '못된 어린이는 정말 못됐다'라고 적었을까? 아마도 '어린이는 원래 착하다'라는 전제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되게 구는 어린이니까 그건 정말로 못된 것이라고, 내가 이해해줄 여지가 없다고, 미워하는 나를 정당화하며 그렇게 쓴 것이다. 같은 말을 어머니한테 들었을 때보다 어린이한테 들었을 때 더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어린이에 대한 그런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순진무구해야 할 어린이한테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배신감도 들고 자존심도 상했던 것이다. (283-284)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나는 어렸을 때 이랬다'는 기억을 근거로 '어린이는 이렇다' 또는 '어린이는 이래야 한다'는 정의가 내려지는 식이다. 그렇게 각자 착한, 활달한, 얌전한, 공부잘하는, 어른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를 떠올리고 주변의 어린이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 어린이가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식당에서 안 울었는데 저 아이는 왜 울지?' 하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어린이는 자기 자신, 딱 한 명이다. 그것도 자의적으로 정리된 기억이다. 그것만으로 어린이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린이를 이해하려면 눈앞의 어린이를 보아야 한다. (285-286)
25.5.5.
북눅 순라점에 방문해서 『어떤 어른』 완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김소영 작가의 글에는 (날이 갈수록 감정이 메마르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 나조차도)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따뜻함과 다정함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못난 어린이(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만 18세까지는 모두 어린이다)를 많이 만나다보면 닳고닳는 마음을 내려 놓으며 살게 되는데, 그럼에도 어린이와 어른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작가의 마음에 감탄하며 읽었다. 오늘 읽은 뒷부분에서는 「동심이란」과 「어른의 어른」이 인상적이었다. 「동심이란」을 읽을 때는 내가 동심이라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 생각해보았고(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결이겠지), 「어른의 어른」을 읽을 때는 작가가 찔렸던 부분에 나도 같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른이 될 생각은 않고 본받을 어른이 없다며 한탄하던 시간들이 나를 응시하는 느낌.
동심에 대한 오해는 결국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와 떼어놓는다. 어린이가 옳은 마음이나 천진한 낙관을 보여줄 때 단지 어려서, 순진해서,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심은 찬미되는 만큼이나 무지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것,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잃어버려야 성숙해지는 무언가로. (292)
그런데 어쩌면 내가 '좋은 어른'을 바라는 마음에 조금 불순한 구석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느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저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과 동갑이에요. 그때 소식을 알면서도 선생님들이 하래서 그냥 공부를 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이제 저는 어른이 되었는데 그 친구들은 아니잖아요. 과연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해요. 그 뒤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저도 그때 공부하라고 하던 선생님들이랑 똑같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그분은 내게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어린이와 관련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사실 자주 듣는 질문이다. 전에는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어린이를 존중하는 어른"이라거나 "책임을 다하는 어른" 등으로 답하곤 했는데, 그날은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서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뭐라고 얼버무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마 횡설수설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어른'으로서 목격한 나에게는 그 질문이 마치 여태 어른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질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302-303)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걸까?
내 마음을 파고들어 본다. 내 마음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존경하는 어른들이 있으면서도 툭하면 '이 시대는 진정한 어른이 부족하다' '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아쉬움을 부풀렸다. 내가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참조할 세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거리를 미리 만들어둔 것 같다. (303)
정확하게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어른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권위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어린이가 어른에 속해 있는게 아니라 어른에게 기대어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른 뒤에 숨지 말고, 그분들한테 기대어서. (304)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할 때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순식간에 판단하고 행동하는 분도 있지만 나는 어린이한테 화장실 순서를 양보할 때조차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도 계속 손톱만한 용기라도 내보려고 한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내 생각에는 '친절'만큼 구체적으로 세상에 윤기를 더하는 행동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나의 친절을 이용하거나 나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럴 테면 그러라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줄 친절이 줄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지는 게 되니까. (325)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