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10.
『모래 사나이』 마저 읽기. 「장자 상속」이 마지막 작품이었고 해설까지 마무리함. 세 편 중에는 「장자 상속」이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되었다. 세 편 모두 대체로 ① 초현실적인 현상을 경험하고 혼란에 빠져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만 ②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건 너의 의지/의식의 발현이니 이성으로 환상을 물리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③ 신비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④ 다시금 초현실적 현상(또는 환상)과 마주하여 추락/극복/탈출하며 현상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는 구조를 가지는 듯하다. 당시 낭만주의자들이 “중세 독일의 전설과 민담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하니 기이하면서도 몽환적인 작품의 분위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이 되기도.
25.2.11.
서리북 16호 완독. 보건의료에 대한 서평과 기후 위기에 대한 서평이 인상적이었고, ‘고전의 강’ 코너는 스펜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펜서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동진_「기자의 눈으로 본 K-의료의 정치경제학」
적어도 "2010년 이후 수행된 연구들은 어떤 데이터를 활용하든, 어떤 분석 방법을 택하든 대부분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23쪽)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원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교수 홍윤철에게 의뢰하여 제출받은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 인력 적정성 연구」조차 시뮬레이션한 시나리오 중 최대 규모인 1,500명 증원으로도 2043년까지는 계속 의사 수 부족이 심화되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증원으로는 더 오랫동안 더 큰 규모의 의사 수 부족을 감수해야 한다고 예측한다. 2003년 의대 정원이 10퍼센트 감축된 이래 20년째 정원이 동결된 사이 의사의 평균 소득이 다른 직군에 비하여 가파르게 올라가고 한국이 평균 임금 대비 의사 소득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된 사정도, 같은 기간 의대 입학 성적이 한없이 치솟은 사정도,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25쪽, 27쪽) 부족한 건 '과학적' 사실이다. (155)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원인은 여럿이지만, 그중 중요한 것이, 다시 저수가이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은 현대 국가가 어떻게든 보장해야 하는 가치에 속한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말이다. 그러자면 받는 서비스는 같은데 돈은 부자가 더 내게 해야 한다. 건강 보험이 그 역할을 한다. 서비스는 의료인이 하고 환자가 받는데 돈은 제3자인 건강보험공단이 내므로,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의 기준은 '행위별 수가(酬價)'이다. 특정 행위를 하면 그때마다 얼마씩 주기로 정한다. 이 수가가 '낮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 때 건강보험 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 시장 가격보다 꽤 낮은 가격을 수가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이다. 지금은 시장이 없어진 지 한참인데, '낮다/높다'는 어떻게 정할까? 건강보험공단이 직접 운영하는 유일한 병원인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이 일종의 테스트 베드로 쓰인다. '적정 진료'를 정하고 그렇게 할 때 수가가 얼마나 커버하는지 본다. 물론, 의료진의 '적정' 인건비가 원가에 포함되어 있다. 민간 의료 기관이 저런 의미의 '적정 진료'를 하는 것도 아니다. '원가보상률'이 100퍼센트가 안 된다는 게 의사의 통장 잔고가 줄고 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의사는 고소득 직종이다. 그러나 '원가보상률'이 70-80퍼센트밖에 안 되고 수가가 다른 나라보다 제법 낮다는 건, 기준을 무엇으로 잡든 낮기는 낮음을 시사한다. (157)
문제는 보건의료 정치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들인 "정부와 의사의 관계"가 우리나라에서는 "미정립" 상태라는 데 있다.(51쪽, 226-227쪽)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막막한 지적이기도 하다. 기존 인력의 재배치만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일단 재배치부터 해보고 안 되면 증원을 논의하자는 건 하지 말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애초에 의사 수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입장에서라면 그럴 의도로 한 말일 테다). 반면 증원만 하고 그 뒤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수가만 올리고 행위량을 통제하지 못하면 돈만 더 나간다. 수가는 그대로 두고 행위량만 통제하면 의사의 소득이 줄거나 줄어든 소득을 벌충하기 위한 또 다른 왜곡이 나타난다. (159)
조천호_「불타는 폭염에서 불타는 야망으로」
우리말의 '무더위' 또는 '찌는 듯한 더위'는 기온이 높을 뿐만 이 아니라 습도도 높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기가 습할수록 땀이 수증기로 증발하기 어려워져 몸에서 열을 빼내기 힘들어진다. 습한 폭염이 마른 폭염보다 더 위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우리 몸에도 한계 온도가 있다. 습구온도 35도가 습한 폭염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의 최대 한계이다. 이 한계를 넘으면, 우리 몸은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열을 발생시켜 결국 죽음에 이른다. (168)
무더위에 에어컨을 틀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위험한 삶의 방식이다. 에어컨은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의 모든 광기와 역설을 상징하며, 개인의 안락함을 위한 기술이자 망각의 기술이기도 하다. 수 세기 전부터 시도되어 검증된 비기술적 기후 대응은 이로 인한 망각 때문에 대부분 무시되거나 잊혀져 왔다. 그 결과 공기 흐름, 하얀 지붕, 두꺼운 벽 등 폭염을 염두에 둔 건축 방법을 잊은 사회가 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에어컨은 복잡한 문제를 기술만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이며, 폭염의 불평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를 상징한다. 더워질수록 이 격차는 더 커진다. (170)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돼 있다. "인간은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더워질지, 나아가 [앞으로 닥칠] 역경과 소란을 헤치고 서로를 얼마나 많이 보호해줄 수 있을지를 통제할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457쪽, 재인용) 인간이 일으키는 폭염은 결국 인간의 손길만이 해결할 수 있다. 폭염 대응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감수성이 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즉 폭염이 우리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174)
김도형_「이상적인 사회로의 진화, 아니 진보에 대한 지적 탐색」
그러나 스펜서의 이름이 다시 본격적으로 소환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이후의 일로, 이것은 제국주의와 그 유산인 냉전이 끝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치, 경제사상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스펜서 이론의 궁극적 목표가 개인과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적 논의에 어떠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또 같은 시기 동아시아 담론의 부상과 함께 동아시아의 근대에 영향을 끼친 서구 사상 가운데 유력한 것으로 주목받은 사회진화론 의 영향 관계를 다룬 많은 연구들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항상 다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인간과 사회를 철저한 과학적 관찰과 논증에 입각해 논의함으로써, 거기에 전통적으로 가정되어 왔던 '특별함'을 부정하고 인간과 사회를 철저하게 자연의 일부로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방식은 신경생물학의 입장을 반영하여 인간의 전통적 가치, 문화, 종교, 이데올로기 등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현재의 인문사회학 트렌드와 잘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198-199)
잘 알려진 것처럼, 당대 생물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선택을 중심으로 하는 진화론을 주창했던 다윈은 진화로부터 목적론적 지향을 배제함으로써 기존의 학설, 특히 라마르크의 설명과 차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스펜서는 동시대인으로서 다윈의 논의 역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법칙에 어떤 목적성을 전제하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스펜서가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일 체의 자연 현상─생물과 사회는 물론 무기물까지를 포함하는─의 변화 법칙과 일치하는 방식으로의 설명을 시도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212-213)
기존의 많은 연구들에서 언급하는 '다윈의 탈을 쓴 스펜서'라는 식의 표현은 문제가 있다. 이 말은 스펜서에 의해 오해받는(다윈은 사회진화를 말한 적이 없는데 그것을 스펜서가 무리하게 적용해 해석했다는 식의) 다윈이라는 전제 위에서 나온 표현인데, 정작 오해받는 쪽은 스펜서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 판된 것은 1859년 11월의 일로 도리어 스펜서의 『진보의 법칙과 원인』보다도 뒤의 일이었다. 살펴본 것처럼 이미 이 시기의 스펜서는 다윈의 생물학 논의 이전부터 자기 나름의 진보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유기체와 무기체의 구별마저 없는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논의였다. 스펜서는 자서전에서 "다윈 씨의 견해와 나 자신의 견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생물진화론에 대해서 용불용설과 이 법칙 및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생겨난 변이의 유전적 전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골자로 하는 라마르크주의를 계속 고집했는데, 왜냐하면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특색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주장이 사회•문화 의 영역에서는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만일 생물학에서 부정된다면 유기체와 자연 현상을 동일한 법칙으로부터 파악 하는 데에서 도출되는 사회진화의 필연성의 논거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자연과학자로서 자기의 연구 영역인 생물진화론을 사회로까지 확대 적용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스펜서는 물리적·유기적·사회적 일체의 현상을 종합하여 설명하는 단일 원리로서 진화론을 제시하려고 했고, 이때 획득형질의 유전은 결국 사회의 진보를 설명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였던 것이다. (213-214)
백수린_「단 한 권의 책」
출간된 텍스트는 살아 있는 생명체나 다름없고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걸 알고 있지만 번역할 때 나는 원저자의 의도대로 충실히 연주하는 음악가,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는 배우가 되고 싶다. 작가로서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텍스트를 쓰면서 의도한 바를 내 마음처럼 온전히 알아줄 단 한 명의 이상적인 독자의 존재를 꿈꾸는 사람이고, 번역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기를 은밀히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나의 바람은 매번 미끄러지고, 작가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는 일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언어적·문화적 간극 때문일 테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타자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나는 언제나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숙명을 지닌 셈이다. 하지만 나는 실패가 자명하더라도 자꾸 무언가를 하려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니까 또다시…….(234-235)
『겨울의 언어』를 1부까지 읽음. 1부는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쓴 글이 주를 이룬다. 자신의 일상과 여행에서 찾는 자신의 지향하는 삶의 태도라고 정리할 수 있으려나. 물론 다양한 글들이 묶여 있어 하나로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2부는 책에 대한 글들이 묶여있는 듯하여 더 기대가 된다.
『시녀 이야기』 읽기 시작.
25.2.14.
『시녀 이야기』 읽기. 100쪽이 넘어가면서 화자가 조금씩 던져주는 단서를 따라가며 소설의 배경이 어떤 설정인지 흐릿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소위 “의식”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행위들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의식을 치르다니라며 뜨악하기도.


어바웃더챕터라는 곳에 방문. 여러 부분에서 블루도어북스가 연상되는 분위기와 배치다. 가지고 온 책을 읽을까 하다가 서가를 둘러보기로 하고 보는데 아주 나의 취향은 아닌 편.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가 고른 책은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 20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아버지의 압제가 담담하면서도 서글프게 펼쳐진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아버지의 오만함이 소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120쪽 정도까지 읽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 덮어두고 나왔다. 다음에 더 읽기를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