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
『겨울의 언어』 읽기. 여행지에서 잠시라도 펼쳐본 유일한 책이었다. 그 후 쭉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기. 라디오에서 이어지는 유행과 동시성에 대한 글, 예술 경험과 경청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계발서에서 이어지는 책의 세계에 대한 글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여행지를 산책하면서 나도 이렇게 깊이 생각해보았으면(마냥 활보만 하지 않고), 활자에 대한 사유를 나도 이렇게 글로 펼쳐낼 수 있었으면 하고.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더 이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없다.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트위터에서 하루 종일 회자되는 사건이 페이스북에서는 잠잠하고 지상파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유명세를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의 '유행'이란 주류로 분류되는 몇 개의 매체에 동시에 노출될 때에만 간신히 성립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이 필요하기에 기업이 유행을 주도하기는 더욱 용이해진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해석하며 유행이란 이 종교를 유지시키는 제의와도 같다고 보는데, 이 새로운 종교의 화신과도 같은 거대 자본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제의를 계속해서 규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의 유행이란 동시성의 감각이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만들어진 감각일 수도 있다. (41-42)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고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만큼 섬뜩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반대로 모두가 획일화의 틀에 갇힐 것임을, 결국 그 틀을 깨야 할 것임을 줄줄이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바라건대 그리운 것은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DJ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또 한 번 돌아오는 하루의 짐을 조금 나눠 질 수 있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다. (42)
향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책으로 진입하는 머리글을 읽을 인내심과 스크린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두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와 초조함과 마법 같은 이끌림과 불현듯 다가오는 슬픔 같은 것들이 몸을 통과하도록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작품 역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요약된 소설과 압축된 영화와 후렴만 있는 음악은 심장에 도달할 힘을 잃을 것이다. 예술의 경험이란 작가와 향유자가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삶의 경험이다. (50-51)
시간을 견디는 경험이란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노력이며, 흘러가는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시도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延長)이 된다. (51)
수전 손택의 그 유명한 말대로 사진을 찍는shoot 일은 총을 쏘는shoot 일과 같고,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범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그 사람이 자신에게서 전혀 본 적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해 절대 가질 수 없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그것도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 어떤 의미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 내 마음대로 사각형의 모습으로 재단하는 일을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담아두고 싶다는 큰 욕망보다 내 삶만을 복기하겠다는 소박한 욕망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상한 타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나의 소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던가? (56-57)
*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사진에 관하여』, 이후, 2005.
우리에게 인과가 중요치 않다면,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한 여러 모습을 기어코 연결하여 하나의 진실로 만들려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에 박제된 단면에게 삶의 진실을 담보하는 부담을 안기지 않을 수 있을까. 타인에게 나를 낱낱이 이해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어떤 것도 기워내거나 요청하지 않는 채로, 사건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통과해보낼 수 있을까. 판단을 멈추고 잠시간 세상을 고요히 둘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결벽일까. (60)
모든 여행지에서의 산책은 현실을 비현실로 체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기망 행위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비현실에 자신을 내맡기고, 순간순간 들이켜 마시게 되는 현실의 순간들—습하고 뜨거운 공기, 잃어버린 지갑, 정리되지 않은 가방, 길을 찾느라 다 쓴 시간—을 급하게 낭만이라는 포장지로 둘러싼다.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그곳의 현실은 곧 비현실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나의 터전이 아니기에 나는 손쉽게 그곳을 비현실로 만들 수 있다. (68)
우리가 서로의 엽서인 만큼이나 우리는 어디에선가 좌절해야 한다. 삶은 이어지고 현실은 포장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산책, 혹은 여행 같은 산책, 혹은 여행이기를 바라는 산책에는 모두 잠깐의 자기중심적 환상이 있다. 물론 환상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겠냐마는. 나는 광화문의 길쭉한 건물들을 올려다보면서, 지금 저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동물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을 탓하면서, 머쓱한 마음으로 엽서의 일부가 되곤 하는 것이다. (71)
자기계발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취할 것을 주문한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너의 세계라고 확신시킨다. 바로 이곳에서 살아남아 적응할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 땅을 바꿀 생각을 하기 전에 나무를 크게 키워낼 것.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때로 다음과 같은 말들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하지 말 것. 부정하지 말 것. 속삭이지 말 것. 땅에 붙은 것들을 무시하고, 뛸 수 있을 때 걷지 말 것. (74-75)
'고향 없는 인간'. 『책의 말들』의 에필로그에도 썼듯 나는 땅에 발붙이지 않은 모든 이를 스승으로 섬긴다. 고향 이 없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처한 세계를 뒤집어보는 사람, 그래서 오로지 인간과 지구에게 더 나은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궁구하는 사람들의 뒤를 한 걸음 뒤에서 따를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라고 말하는 책보다 나를 멀리 데려가는 책을 원한다. 내가 아닌 사람, 여기가 아닌 곳, 지금이 아닌 때로 나를 데려가주기를. 그래서 나의 오래된 시야도 생각도 감각도 재편해주기를.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겪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허락해주기를,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76)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맞부딪히는 주문 속에서 "인간이라면 모두를 제치고 성공하라"라는 주문은 유일하게 힘을 잃는 주문이 된다. (78)
25.2.7.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를 다 읽음. 1권만큼의 재미를 찾기는 힘들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들도 1권보다는 적은 것 같기도 하고.
25.2.8.
서리북 16호 읽기. 『정년이』는 단행본의 출간으로 알라딘에 노출되었을 때부터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고,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반가웠지만 챙겨보진 못했다(드라마를 본방으로 챙겨보는 일은 거의 없다. 나중에 챙겨보는 일도...). 그런 점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 서사에 대한 내용들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선우훈_「재밌지 않니?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되어 왔던 여성의 목소리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구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의 출발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벡델 테스트(Bechdel Test)'이다. 이 테스트는 미국의 유명 그래픽노블 작가인 엘리슨 벡델이 1985년에 그린 『주목할 만한 레즈비언들(Dykes to Watch Out For)』의 한 에피소드에서 등장인물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으로 처음 제시되었다. 그 기준은 세 가지로 매우 간단하다. 첫째,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할 것. 둘째, 그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것. 셋째, 그 대화의 주제가 남성에 관한 것이 아닐 것. 하지만 이 기준을 충족하는 작품이 흔치 않았기에 단순히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부재를 강조하기 위한 농담으로 시작되었던 벡델 테스트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에서 흥행 50위 내에 든 작품들을 조사한 결과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은 고작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15-16)
'극'을 소재로 삼은 만큼, 1976년부터 아직까지 연재 중인 미우치 스즈에의 전설적인 순정만화 『유리가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주인공이 동경하는 멋진 세계, 실력 있는 라이벌과의 경쟁, 작중 등장하는 다양한 연극과 소재, 엇갈리는 로맨스 등 두 작품은 비슷한 점이 많다. 『유리가면』이 연극 세계에서 주인공의 성장과 라이벌 간의 경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듯이, 『정년이』도 여성국극이라는 독특한 배경 속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다. 『정년이』만의 특색은 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의 고뇌는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여성들이 겪었을 법한 고충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20)
백합물이란 여성 간의 성애를 그린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일본의 남성 동성애물 잡지 《장미족(薔薇族)》의 편집장 이토 분가쿠가 남성 동성애물의 독자들을 '장미족'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 동성애물을 향유하는 독자들을 '백합족'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성향의 작품들은 '장미물'과 '백합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성 동성애물은 이후 대표작의 제목에서 유래한 '야오이(やおい)'로 통칭되다가, 최근에는 'Boys Love'의 약어인 'BL'로 불리며, 여성 동성애물 역시 이에 대응하여 'Girls Love'의 약어인 'GL'로 불리기도 한다. (22)
그런데 이렇게 굴절된 판타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에는 간극이 많이 좁혀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GL이나 BL은 실제 성소수자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드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장르들은 성소수자를 대상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한계도 있다. 해외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개선되면서,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동성혼이 법제화된 이후에는 '금지된 사랑'이라는 비극적 서사보다는, 동성 커플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는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동성애물이 동성애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보다는 이성애자들에게 대상으로서 소비되면서, 막상 실제 성소수자는 사회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모순이 존재한다. (24)
안타깝게도, 『정년이』에게도 결국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작품이 드라마화되면서 권부용이라는 캐릭터가 삭제된 것이다. 권부용은 정년이의 첫 무대 이후 '백합'으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등장하고, 클라이맥스에서 정년이와 키스하는 내용까지 암시된다. 그는 퀴어물로서 『정년이』의 닻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로, 작품의 핵심 재미를 발생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년이』는 여성 서사이면서 『유리가면』 같은 순정만화이며, GL이면서 권부용을 통해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인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서이레 작가가 이 모든 것을 그리고자 했기에 여성국극이라는 소재를 발굴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될 정도로, 『정년이』의 요소들은 권부용이라는 인물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 규범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이 지워지고 말았다. (26)
'존재의 삭제'는 소수자들이 흔히 겪는 문제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드라마에서 삭제된 캐릭터는 권부용뿐만이 아니다. 비록 주연급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된 남장여자 고 사장 또한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 고 사장은 작품 내적으로 정년이가 여성 국극에서 남성 역할을 연기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근대 초 한국에 존재했으나 지금껏 조명되지 않았던 다양한 성적 실천을 형상화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이처럼 드라마 〈정년이〉에서는 핵심적인 퀴어 인물들이 모두 삭제되면서, 여성국극이라는 소재와 주제 의식 간의 긴밀한 연결고리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27)
리뷰 공모전 당선작들을 읽으며 서평을 통해 독법과 자신의 사유를 풀어내는 방식에 감탄하기도 했는데, 특히 최우수작이 다루는 전장연 시위에 대한 글을 읽으며 나도 장애운동의 역사성을 무시한 채 단편적인 뉴스로만 이해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겪었던 불편함이 “사건”의 징후일 수도 있으며, 불편함에서 머무르지 않고 이 균열이 가리키는 사회 구조의 부당함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김도형_「전장연 시위라는 사건」
이처럼 전장연 시위를 둘러싼 담론이 단지 그 수단이 초래한 일상의 불편함 수준만으로 축소된다는 것은, 사회 내 대다수가 포체투지라는 행위와 시위 전반에 내포된 다층적인 의미에 굳이 주목하거나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일종의 징후다. 사건이란 본디 일상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독특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사건만이 지니는 독특하기에 충만한 의미는 기존 의미 지평과는 통약 불가능하며, 이것이 사건을 우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는 사건으로 인식될 수 없다. 사건 이후에 촉발된 일련의 변화들로 인해 우리의 인식 지평이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재편된 후에야 뒤늦게 사건은 사건이었다고 회고될 뿐이다. 해당 시점에는 단지 이해 불가능성에 동반되는 증상만이 나타난다.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있던 비장애인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나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중증장애인의 신체와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 어찌할 줄 모름처럼 말이다. (91)
사실 장애운동 역사에서의 이동권 투쟁은 20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사들의 노래』에서 인터뷰 대상자 중 한 명인 활동가 이규식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엘리베이터가 우리가 이렇게 욕을 먹어가면서 만든 건 줄도 모르고 우리한테 병신이 집에 있지 왜 아침부터 나와서 남의 출근길을 막느냐고, 자기들 늦은 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요."(『전사들의 노래』, 236쪽) 혜화역에 현재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는 1999년 혜화역에서 이규식 씨 본인이 리프트를 타다 추락한 사고 이후에 설치되었다. 당시 서울지하철공사는 이를 개인의 과실로 무마하려 했지만, 이규식 씨가 소속되었던 교육 공간인 노들장애인야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시위와 법적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법원은 이를 기관의 책임으로 인정했고 추후 엘리베이터의 설치로 이어졌다.(『전사들의 노래』, 211쪽) 이후 2001년 1월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부부가 타던 리프트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장애운동에서는 장애인이동권연대를 설립하여 국가 기관에 맞선 투쟁을 이어 나갔고 결국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통해 이동권을 법률화하는 성과를 일궈 냈다. (93)
공론화된 담론 내에서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을 비롯한 장애 운동 전반을 '전장연 시위'라는 표현으로 쉽게 일괄하는 현상은 결국 이들의 지하철 승하차 시위 이전의 역사성을 박탈하고, 나아가 관심이 돌아선 이후에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투쟁의 현행성을 박탈한다. 이들은 2021년 12월 3일부터 현재까지 매일 아침 지하철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2024년 6월 3일부터는 포체투지를 100일 동안 서울 곳곳에서 진행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역사를 부여받지 못한 사건은 한 사회 내의 서사로부터 배제되며, 이는 우리가 지하철 행동을 단지 단발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고 사고하게끔 한다. (95-96)
두 책의 저자인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겪는 기본권 침해가 결코 법률이나 정책을 하나하나 시정한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짜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제도와 관계를 구성함에 있어서, 미시적으로는 한 식당의 입구를 설계함에 있어 휠체어의 접근성을 고려에서 배제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드러내 보이는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가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숨 쉬듯 반복된다.
이러한 비장애중심주의는 나아가 한국이 이윤 생산을 멈추지 않으려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따라서 생산성 있는 유용한 신체를 우선시한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박경석은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사회적으로는 “컨베이어 벨트가 열심히 굴러가고 있는데, 그 톱니바퀴에 이쑤시개가 하나 끼어버린" 상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석한다.(『출근길 지하철』, 35쪽) 매일 아침 지하철이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정시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마치 '볼모'로 잡힌 것처럼 표현되고 서울교통공사는 한발 나아가 지하철 행동이 끼친 사회적 손실을 돈 액수로 환산해서 발표하지만, 정작 장애인들이 일상조차 누리지 못하면서 고통받아 온 "평생의 시간은 비장애인들 1분의 시간만큼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출근길 지하철』, 32쪽) 생산성 있는 신체의 효율적인 노동 시간은 항시 보장되어야 하고 국가는 이를 위해 사회 기반 시설과 새 산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제때 투자하지만, 장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사회 구조 마련에는 속도가 더딘 이유로 언제나 국가 예산과 사회적 비용이 거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98-99)
애초부터 포체투지와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 나아가 장애운동 전반의 목적이 대중들의 공감과 동정을 유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안일한 착각일 수 있다. 분명 기어가는 행위는 활동 당사자들에게도 수치스러운 행위이지만 이들은 "생존을 위해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는 자기 몸을 내던지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전사들의 노래』, 108쪽) 이 권리 주장은 나아가 단지 기존의 권리 목록을 단순히 답습하면서 정부에 이를 반영할 것을 행정적으로 요구하는 차원의 주장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한 사회 내에서 권리를 생각하는 기존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며, 이를 국가와 동료 시민들 앞에서 정당화하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동권과 활동지원서비스 보장 등의 요구들이 단지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한 기본권이자 사회가 모두를 위해 의무적으로 마련해야만 하는 기본 구조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권리를 생각해 온 우리의 일상적 사고 방식의 변혁을 요구하는, 따라서 새로운 권리의 목록을 생산하고 자 하는 급진적 주장이며 자신들의 주장이 사회가 정당히 받아들여야 하는 요구라는 것을 이들은 온몸으로 상연하고 있다. 자신들이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101)
결국 이들은 스스로 신체적 존엄성을 내던지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 또한 동료 시민에게 기존의 권리 체계가 정당한지 논의해 보자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이자 같은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으로서 지닌 존엄성을 증명해 보인다. 기어가는 몸짓에 권리 주장이 체현된 이러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동정이 아니라 숭고다.
우리가 포체투지 장면을 바라보며 일차적으로 느낄 수 있는 두려우면서도 낯선 당혹감은 이들 또한 권리의 정치적 주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느끼는 숭고함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이렇게 포체투지는 기어가는 행위의 의미가 단지 동정의 몸짓에만 국한되던 기존 시선을 깨트리고 정치적 주체의 숭고한 몸짓으로 이를 전용하는 전복적 행위가 된다. (101-102)
25.2.9.
『모래 사나이』 읽기.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에는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그 중 「모래 사나이」와 「적막한 집」을 읽었다. 두 편 모두 분위기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에서 고딕 소설의 느낌이 전해진다는 점, 초현실적인 현상이나 설정을 사용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특히 「모래 사나이」의 막바지에 밝혀진 사실들을 읽을 때는 깜짝 놀랐을 정도. 시인이나 몽상가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그의 대립항으로 이성이 언급되는 것도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