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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님의 서재

24.12.02.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완독. 페소아의 『불안의 서』(봄날의책)에 대한 글로 마무리. 잠들기 전의 상태에서 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불안의 책』(문학동네)을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수도 없이 긋고 그걸 정리해보겠다면서 일일이 적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제풀에 지쳐 어느 순간 읽기를 멈추고 그대로 덮어두었더랬다. “가장 무방비한 감각과 감정을 기록하는” 작업. 그 작업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불안정한 ‘나’들과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 속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페소아의 이명에 관한 책도 많이 사두었는데 여전히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리스본에서도 인상깊었던 장소들 중 하나가 페소아 박물관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건 수면 직전에 씌어졌을 이 책은 어느 정도까지의 각성 상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려는 듯하다. 동시에, 지독한 각성 상태가 잠과 꿈과 가장 흡사하다는 것도 입증을 하려는 듯하다. 또한, 이 『불안의 서』의 페르소나인 '소아레스'를 이미 미쳐 있는 자이자 미쳐버린 지 너무나 오래되어 도리어 정상에 가까워진 자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상적인 척을 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파악할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관성이 되어 버려 감지할 수 없는 것까지를 볼 수 있는 '진짜 인간'의 상태. 이미 미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각성 상태. (209)


어쩌면 이 책이 "잠을 위한 찬가"가 아닐까. "나는 잠자는 듯이 글을 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지루하기 때문에 일을 하듯이, 때때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나는 꿈꾸는 상태에 빠진다. 생각하지 않는 자라면 그런 백일몽 속에서 자신을 잃겠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잃는다. 나는 산문으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참혹하고도 가열찬 불안과 상념이 범람할 때에 그리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만 같은 상태가 될 때에, 그 무게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수 없다면, 달아나는 일과 가장 닮은 행위는 그것에 대하여 무방비하게 감각하고 그걸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210)


어설픈 현자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런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꽃나무가 더 이상 꽃나무이기를 포기하는 꽃 지는 계절처럼, 장마가 더 이상 장마이기를 포기하는 쨍한 다음 날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212-213)


『불안의 서』는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 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혹의 무상함을 일깨우기 위해 독자를 현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독자를 현혹하지 않은 채 불모의 사막지대를 펼쳐 보이고야 만다. '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구나'라는 감동을 독자는 굳이 느낄 필요가 없다. 단지, 모든 고백은 "내 비루한 존재가 삶 앞에서 자신을 위장한다”는 현상을 견디기 위하여 적혔을 뿐이니까. (215-216)


에필로그의 마지막 말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선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그것을 표현한 문장의 결을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사랑이 으레 그러하듯 그것을 나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것도 내 몫이다. ‘사랑’이 아닌 ‘사랑함’에 대해 고민해보았던 시간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23)



24.12.03.
















『딕테』 읽기. 서문?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딕테(Dictee, 받아쓰기)에서 몇 차례 길을 잃고 더듬더듬 읽는다. 천주교의 미사와 화자의 의식의 흐름이 뒤섞인 듯한 파편적인 글들. 겨우겨우 졸음을 쫓으며 읽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한 순간에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소식들을 끊임없이 찾아보느라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한 사람이 이렇게나 우리 시대를 퇴행시킬 수 있다는 것에 허망함과 환멸을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든 일단 막아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각 장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뮤즈와 그들의 고유 예술 영역을 차용하여 명명한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가 아흐레 동안 제우스(Zeus)와 동침하여 아홉 명의 뮤즈 신을 낳듯, 책의 구성은 가톨릭 의식인 ‘9일간의 기도(novena)’로 이루어져 있다. 차는 기도 의식을 관장하는 인물이자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여주인공 화자 ‘말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만주 태생인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 여사와 성 테레사가 있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 선 여성들이자 주체적 인물이다. 이들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 「‘딕테’가 돌아온다」, 하퍼스 바자, 2024.11.07.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72954)



24.12.04.


『딕테』 계속 읽기.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아홉 딸들의 이름이 목차처럼 나오는데 그 중 「클리오 역사」에는 유관순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관순의 서사와 기억과 기록에 대한 조각들. 앞선 글에 비하면 읽기에는 수월하나 송곳처럼 드러나는 단상들에서 멈칫멈칫한다. 시적인 것 같기도, 무의식 같기도 한 것. 어제의 여파인지 어떤 구절에 오랫동안 눈이 머물렀다. 기록하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이유.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24.12.05.


『딕테』 계속 읽기. 「칼리오페 서사시」는 작가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구성되어 있다. 만주에서 작가 자신처럼 이방인이었던 어머니의 삶이 꿈과 같은 몽환적인 장면들과 얽힌다.



24.12.06.















오늘 받은 책 중엔 『어떤 어른』이 있었는데, 책 상태를 확인하고자 펼쳤다가 인쇄된 사인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사이 찾아온 이 난장의 겨울에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문장들.



『딕테』 계속 읽기. 「멜포메네 비극」에는 분단 이후 1962년의 사건이, 오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내려 노력해보고, 군인과 경찰이 나오는 대목에선 자꾸 계엄령과 군인들의 모습이 상기된다.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24.12.08.














『어비』 읽기. 내가 읽었던 김혜진 작가의 장편들이 연상되는 단편들이 몇 개 보인다. 초기 단편집이어서 내가 읽은 이후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건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들. 바틀비의 후계인가 생각했지만 먹방 bj가 된 어비(「어비」)나 「아웃포커스」의 엄마, 「한밤의 산행」의 소년이 그렇다. 마냥 웃을 수 없는 건 이들이 처한 문제가 겨냥하는 것은 결국 이 세계, 생존을 위한 투쟁이 디폴트가 되어버린 구조이기 때문.



『딕테』의 「에라토 연애시」를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니 페이지 번호는 순서대로인데 페이지가 서로 바뀌어 인쇄된 부분들이 있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발견한 만큼은 알라딘에 문의를 남겨놓았는데, 애초에 파편적인 텍스트라 내가 미처 발견 못했는데 더 많은 곳에 뒤죽박죽이 된 페이지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커졌다. 북펀딩으로 받은 도서가 이렇게 오다니... 에라토는 성녀 테레즈에 대한 이야기.




덧) 오늘(24.12.10.) 아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으나 일하는 중이어서 받지 않았는데 문의한 내용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원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라는 이야기... 궁금한 점은, 원서는 아마도 영어이거나 프랑스어일 것으로 보이는데 페이지의 내용을 작가가 뒤죽박죽으로 섞은 것이 이렇게 구현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뒤의 해설까지 읽으면 그 의도와 편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혹시 몰라 문의한 내용과 해당 페이지를 캡처해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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