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8.
『사랑이라니, 선영아』 읽기. 점차 선영과 진우와 광수의 삼각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난 후에 다시 읽으니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김연수 특유의 고유어 사용도 많이 줄었고, 사건에 들어가기 전 상념처럼 서술되는 사변들도 줄었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쫀쫀하다'는 말은 원래 옷감의 발이 대단히 고르고 곱다는 뜻이다. 쫀쫀한 인간들이 가장 살차게 구는 게 조금 삐져나온 보풀이다. 아직은 비인지 눈인지 구별하기 힘든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광수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다면 꽃이 아니라 신부만 바라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광수는 그만 부케를 보고야 말았다. 친구 명희를 향해 선영이 던지려던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에 부러진 채 달랑달랑 매달린 팔레노프시스 한 송이가 광수의 마음에 재를 뿌렸다. 그건 새로 산 스웨터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삐져나온 털실 한 올과 비슷했다.
‘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11)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 누워서 바라보는 페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 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 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46)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47-48)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 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48)
24.11.25.
『사랑이라니, 선영아』 완독.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 당시 김연수 작가의 사랑론과 두 남자의 찌질한 사랑 이야기의 이중주.
하지만 어떤 사람을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는 뜻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춤을 추는 일과 흡사하다. 이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눈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애정이 없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 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 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63-6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단계는 나이트클럽 플로어를 비비며 강종거리기 바로 직전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습하게 마련이다.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연습하든, 자기 방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연습하든, 연습할 때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거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천산지산 갈라졌던 자신의 정체성을 추슬러 하나의 '나'로 끼워맞추는 조련찮은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온전한 하나의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64)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 집 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비가 2」에서는 이렇게 끝을 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왜 기형도는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위대한 혼자에 대한 얘기로 시를 끝맺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애당초 "사랑해"라고 말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할 때 봤던 그 얼굴을 향한 사랑만이. 1982년 8월 28일, 기형도는 일기장에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라고 썼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늘 연애중이었다. (66)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부부다. 우리는 사랑의 학교에 앉아 현대사회라는 불확실한 무방비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이 학교의 모범생들이다. 이 모범생들은 꽃다발과 샴페인과 밸런타인 카드가 있던 자리에 대중심리서와 부부클리닉과 자기계발서를 갖다놓는 식으로 신학기 환경미화 활동을 끝맺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낭만적인 사회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67)
"그럼 어렵게 얘기해줄까? 이타심은 아래를 향한 감정이야. 타인을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그럼 이기심은 뭐냐? 위를 향한,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야. 이렇게 자존심 상해서 살 수 없으니까 고쳐 달라. 이게 바로 이기심이야.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알겠어? 나는 80년대에 데모했던 새끼들 대부분이 그런 심정으로 돌 던졌다고 생각해.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보여주려고. 그러니까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것 아니겠어?" (81-82)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영영 남게 된다. “너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를 영어로 작문하라면 "You never know"가 될 것이다. 하지만 대화에서 관용적으로 쓰일 때, 이 문장은 '어쩌면' 혹은 '아마도'를 뜻한다.
질투란 상대방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됐다고 생각한 게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이나 '아마도'라는 부사로 시작되는 문장이 하나둘 마음속에서 떠오를 때, 부록처럼 따라오는 감정이다. 그리고 후보선수가 주전선수에 대해 늘 그런 마음을 갖듯이 딸린 감정은 본래 감정을 위협하고야 만다. 그래서 때로 질투는 사랑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라 파탄내기도 한다. (89-90)
사랑이 입을 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즉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야만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도시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혹은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본뜻이 'You never know’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걸 모르면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90-91)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105)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105-106)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당장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때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삶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지렛대로 사용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외계인이 없다면 멀더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장애물을 만난 두 연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 〈페드라〉를 수입한 한국의 영화 관계자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106)
사람들은 저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존재다. 예컨대 1천 송이의 꽃이 있다고 치자. 한 송이 꽃은 1천 송이 중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송이 꽃이 없다면 999송이의 꽃은 존재할지언정 1천 송이의 꽃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천 송이의 꽃이 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 (118-119)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의 몇 부분은 일종의 '어휘용례사전'처럼 읽히는 데가 있다. 가령 그가 진눈깨비를 두고 ‘아령칙하다'라는 형용사에 어울리는 물질"(10쪽)이라고 정의할 때, 혹은 광수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쓰인 ‘쫀쫀하다'라는 형용사와 그 반대의 뜻인 '얼멍얼명하다’라고 하는 두 단어로 소설 전체의 주제를 개관할 때, 나아가서는 ‘알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know'를 플라톤의 『향연』과 성경 창세기로까지 소급하여 어원학적 설명을 시도할 때, 우리는 혹시 이 소설이 몇 개의 어휘를 중심 얼개로 삼은 어휘도상학적 소설은 아닌지 의아해할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어휘들에 따라 인물들이 배치되다시피 하고 있고, 소설의 주제 역시 이들 어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44-145)
사실 광수는 '쫀쫀하다'. 그리고 그의 짝패(double)인 진우는 '아령칙하다' 혹은 ‘얼얼하다'. 광수는 ’know'의 의미를 과신한다. 반면 진우는 ‘know'의 의미를 알맞게 폄하할 줄 안다. (145)
24.11.26.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마저 읽기. 4부는 시집 또는 책에 대해 작가가 쓴 글이 실려 있는데, 읽어본 적이 없는 이병률 시인의 시집에 대한 글보다는 최승자 시인에 대한 글이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이 시대의 사랑』과 『즐거운 일기』에서 내 머리를 후려쳤던 강렬하고 날선 언어들은 이후의 시집들에서 점점 사그러들었는데, 내가 앞의 두 권 외의 다른 시집들을 읽었지만 머릿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 전 작가가 이 책에서 다룬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펼쳤을 때도 치열함보다 달관(또는 체념)의 정서가 흐르는 듯하여 오래 읽지 못하고 덮어두었었다. 김소연 시인의 글에서도 시집 한 권보다 시 세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미처 못 보았던 최승자의 아프면서 날카로운 시적 언어를 보는 동시에 이를 탐독했던, 정서적 혼란과 온갖 실존적 고민은 다 짊어진 것처럼 살고 있던 과거의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간 최승자에게 바쳐졌던 찬사와 걱정 들은, 그가 이 세계에 일체의 편승도 하지 않았다는 염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함을 알아보는 이는 많았어도, 그 염결함을 잘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최승자의 시세계에 전적인 탑승을 하지 않음[못함]으로써, 이 세계에 편승하고 있었던 우리의 염결하지 못함을 되려 염결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83)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문명」 부분
"마지막으로, 실패한 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자가 나란히 눕는 일. 이것은 사랑의 진짜 장면이 아닌가. 낭만주의적 꿈도 아니고, 위악이거나 자학도 아니고, 에로스니 필리아니 아가페니 등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사랑하는 연인들만의 비밀한 실제 모습이 아닌가. 한 남자가 마지막 실패를 하고서 누워 있을 때, 필사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한사코 실패를 거듭해온 한 여자가 곁에 가서 눕는 일. 최승자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날 버렸지,/이젠 헤어지자고/너는 날 버렸지"로 시작하여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를 거쳐서, "오 개새끼/못 잊어!"로 끝을 맺은 「Y를 위하여」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혀야 할 것이다.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말 뒤에 "다시 낳고" 말겠다는 말이 이어지고, "개새끼"라는 말 뒤에 "못 잊어"가 이어지는 시인의 도저한 사랑. (188-189)
이렇게 최승자는 여성이라는 주체가 얼마나 아프게 탄생되어야 했는지를, 사랑의 서사를 통하여 아픈 모습 그대로, 실패한 모습 그대로 드러냈던 시인이었다. 아버지를 초월한 여성, 남성의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성으로서 출생신고를 한, 우리 시대의 첫번째 시인이었다. 시인은 악을 쓰며 산고를 치르는 어미였고, 동시에 공포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아기였고, 동시에 아기를 받아 안던 산파였다. 혼자서 그렇게 태어났다. (190)
최승자가 이끌었던 1980년대의 시는 "시적 화자라는 하나의 가면persona이 없어져버렸"던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공통분모였다. “기존의 시적 관습보다는 자기 진술의 진실성에서 시적 감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민얼굴의 시들은 "진실의 추한 모습”을 드러낸 용 기와 순수에만 가치를 둘 수는 없다. 발설된 추의 세계와 발설하는 자의 용감하고 아름다운 태도, 이 둘의 ‘격차'가 주는 충격이 최승자 시의 진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격차에 관해서라면, 이 시집도 여전한 가치를 지닌다. 지독하고 치열했던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 표표하고 괴이한 권태가 자리 잡은 것이 다를 뿐이다. (195-196)
파국의 파토스가 문학의 귀결점이라는 사실에 그 많은 시인이 동의해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파국의 파토스를 끝까지 수행해온 시인을 우리는 목격해본 적이 없다. 최승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 되어 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멀지 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최승자의 곁에서 예감할 수 있다. (204-205)
최승자의 시세계를 부정의 시학 또는 비극의 시학으로 읽는 것은, 방법적 부정과 방법적 비극으로 읽는 것은, 비천한 시어와 비천한 주체의 카니발로 읽는 것은, 추한 현실을 지독한 직시로 보여주었다고 읽는 것은 대부분 정당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부당하다. 부정과 비극이, 비천함과 추함과 독함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으며 어떤 예감에 의해 추동되었는지, 지금에 와서야 실마리가 제대로 보이는 까닭이다. 최승자만의 혹독한 예감이 리얼리티가 되어 있는 지금, 최승자가 '아픈 자'라면 우리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은 자’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 최승자가 혹독한 예감에 시달리는 예민하고 건강한 시인이었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누구보다 정확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