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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서리북 읽기. 지난 호에 이어서 새롭게 연재되는 ‘고전의 강’ 코너가 눈에 띈다. 이번에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와 『선택할 자유』.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언급했던 경제학자의 저서이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집중해서 읽었다. 프리드먼이 새뮤얼슨과 서신으로 주고 받은 자유로운 논쟁의 이야기를 볼 때는 그런 학문적 풍토가 부러워지기도 하고.














프리드먼의 사상을 되짚어 보는 것은 그와 관련한 여러 오해를 해소하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 그의 사상으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을 얻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흔히 프리드먼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자유방임주의자로 여겨지지만, 이런 고정관념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부의 소득세를 제안한 것에도 반영되어 있지만 그는 복지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인 통화주의(Monetarism)는 정부의 적절한 통화 정책이 경제 안정에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급진적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경제에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와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235)

로즈 프리드먼은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 동기였다. 그러나 가사와 육아 부담 그리고 여성에 대해 폐쇄적인 당시의 학계 상황 등으로 인해 박사 논문 쓰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비 행태를 분석했던 그녀의 연구는 밀턴 프리드먼이 『소비 함수 이론』을 집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그가 대중을 대상으로 쓴 글은 대부분 로즈 프리드먼이 정리하고 적절한 사례를 선정하는 등 그녀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로즈 프리드먼의 이같은 기여에 대해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는 서문에 밝히는 데 머물렀지만, 『선택할 자유』에서는 공저자로 그녀의 공헌을 명시했다. (240-241)

이 외에도 프리드먼은 언론 기고와 방송 출연을 활발하게 했다.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과 정기적으로 번갈아 가며 실었던 칼럼이다. 정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스주의의 대표 학자인 새뮤얼슨과 국가의 자의적인 경제 개입에 반대했던 보수주의자 프리드먼이 당시의 경제 현안을 두고 18년에 걸쳐 전개한 품격 높은 지상 논쟁은 당대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직 경제학계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리드먼의 이름과 사상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렸다. 아울러 그의 칼럼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경제 정책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41)

프리드먼은 『선택할 자유』의 서문에서 『선택할 자유』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다른 주제 가운데 상당 부분을 다시 다루고 있으며, 주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선택할 자유』, 20쪽) 단 내용적 측면에서 두 가지가 추가된 점이 주목할 만한 차이다. 첫째는 인플레이션과 관련한 논의이다.(『선택할 자유』, 9장)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경제는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의 석유 가격 인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는데, 이와 관련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다룬 내용이 추가되었다. 둘째는 정부와 공무원의 행태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을 책 전반에 걸쳐 전개했다. 이는 앤서니 다운스(Anthony Downs),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고든 털럭(Gordon Tullock) 등이 발전시킨 공공 선택 이론(public choice theory)의 연구 성과, 즉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공무원이 자신의 승진이나 소속 부처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아가 이익 집단에 의해 포획(capture)되어 국민의 이익보다는 이익 집단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존재임을 보여 주는 이론적·실증적 분석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244-245)

프리드먼이 대학원에 입학한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학계는 오늘날과 많이 달라서 경제학 이론에 기초해서 현상을 분석하는 작업보다는 제도에 대한 서술에 가까운 연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는 경제학 이론에 기초한 현상 분석 그리고 이를 자료에 근거하여 검증하는 실증 분석을 결합한 연구를 지향했다. 이러한 접근은 상당 기간 비주류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학의 일반적 연구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즉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단순히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연구 방법을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자본주의와 자유』는 그런 혁신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한 책이기에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246-247)

『자본주의와 자유』의 중요한 목적은 케인스주의 비판이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케인스주의, 나아가 사회주의적인 경제 통제는 경제적 자유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마저도 억압하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아울러 케인스주의는 시장이 매우 불안정함을 전제하지만, 프리드먼은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케인스주의자들은 시장의 불안정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대공황을 들지만, 프리드먼에게 대공황은 시장의 불안정성이 아니라 정부, 보다 구체적으로는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에 맞서 통화 공급을 늘려야 할 시기에 통화량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의 재정 정책과 복지 정책은 많은 경우 비효율적이며 많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프리드먼은 주장했다. (249)

프리드먼이 불평등 완화를 위해 부의 소득세를 제안한 이유는 서로 관련된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이것이 기존의 소득세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면 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제도 설계 없이도 복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득세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의 소득을 정부가 파악할 수 있으므로,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을 걷듯이 소득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칠 경우 그 액수만큼 정부가 지원하면 된다는 것이다.둘째는 부의 소득세 제도를 도입하면 복지 제도 운영에 수반되는 정부의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실시하는 많은 복지 정책은 현물 지급 방식이다 보니 복지 정책 실시를 위해 공무원을 추가로 고용해야 하는 등 부대 비용이 크게 소요되는 반면 복지 혜택이 주어져야 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해서 발생하는 여러 부작용이 존재한다. 하지만 부의 소득세는 기존 소득세 제도를 활용하면 되고 보조금 지급으로 모든 업무가 끝나기 때문에 제도 운영과 관련한 비효율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52-253)


24.10.18.














『느티나무 수호대』 완독. 모든 게 완결된 결말은 아니고 진행형임을 암시하며 마무리되었지만 따뜻한 결말. 혹자는 이렇게 문화적 다양성이 넘치는 동네가 한국에 어디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최근에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의 서평을 읽은 후이기 때문. 작가가 던지는 우리 사회에 현저한 문제들은 묵직하지만, 이를 어떻게든 풀어내고 헤쳐나가려 좌충우돌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밝고 당차다.














『가녀장의 시대』 완독. 각각의 장이 짧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쿨하고 재치 있는 서술이 인상적. 세 가족의 일상 이야기도 좋지만 군데군데 가부장제의 모순, 새로운 가족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가볍게 다뤄지면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슬아의 작품 중 처음 읽는 작품이 소설이 되었는데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든 작가의 필력이 부러웠고,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도 다룬 『새 마음으로』에 손이 간다..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효도를 하지 않으리오."
할아버지가 근엄하게 해설했고 그것은 가부장의 말이었다. 감히 내 말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9)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존자에 관한 여러 개의 진실이 시골집 거실에 차곡차곡 놓였다. 마당에서는 배추들이 절여지는 중이었다. (109)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228)


"무화과가 다 익었네. 우리 대표님은 글쓰느라 마당에 무슨 열매가 열렸는지도 모르시겠죠?"
복희가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딴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308)



24.10.20.















도봉산 쪽 카페에서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읽기.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아, 이 책은 내가 좋아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멜로”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양태에 대한 다양한 단상들에 오래 눈길이 남아 줄곧 표시를 해두었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주제는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끝없이 변화하고 증식하는 무엇이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만나서 반갑고, 골똘히 생각해보게 하는 말들이어서 반갑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들이어서 반갑다.

멜로. 원래는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멜로드라마는 노래가 곁들여진 연극이 그 기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홍행하기 시작한 멜로드라마는 기존의 정통극과 달리 통속성과 오락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통속성과 오락성은 멜로드라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스토리텔링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후로 대중이 가장 잘 몰입하고 가장 손쉽게 음미하는 소재가 되었다. (9-10)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 온 문화들을 우선 사랑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멜로드라마의 세례를 받고서 허구적인 사랑 놀음에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이에,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격정적인 감정만을 사랑이라며 동경해왔다. 심정이 짜릿한 설렘과 심장이 저릿한 통증을 함께 겪고 싶다고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거기에 어떤 약속과 어떤 책무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예상은 그다음 순위의 관심으로 미뤄놓지는 않았을까. (10)


나는 사랑에 무능력했던 나의 경험들이 사랑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간 이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을 멜로로 연결 짓고 식상해하던 습관이 사랑에 대한 결례라는 걸 우선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사랑의 내부에 매복해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이 겹겹이 덧씌워진 채로 사랑은 본래의 얼굴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 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왔던 것이다. (12-13)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이 당위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보장해주면 좋으련만, 사랑이 지닌 위험으로 기울 때가 많다. 그래서 타고난 사랑의 능력을 훼손당하기도 하고,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불신하기도 하며, 미지에 대한 당연한 불안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압력과 폭력에서 기인된 트라우마가 심장 깊숙이 각인되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 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 개인의 서사가 두려움 없이 전달되고 이해되며 존중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39)


좋아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 빈축을 살 만한 것일 때에 좋아하는 마음을 쉽게 철회할 수 있는 애호의 세계. 준거집단의 기준에 편입돼야 마음이 편하고 유행을 따라야 뒤처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애호의 세계. 애호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잃는 대신, 같은 걸 좋아함으로써 소속감을 형성하는 기회를 얻는다. 판에 박힌 것을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판 속으로 들어간다. (48)


사람들은 로맨스 서사의 판타지로 배워온 사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하는 사랑은 이토록 구질구질한데 영화 속 사랑은 감미롭기만 하니, 번번이 내가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만 느껴진다. 사랑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만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은 어떤 실수이거나 고행이거나 투쟁처럼만 느껴진다. (56-57)


상처를 남기고 종결된 사랑은 대개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놓여 있다.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종결된 사랑은 별로 없다. 사별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아름답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는 이 역시 별로 없다. 이미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버려진 사랑을 스스로의 발화로 인해 보다 더 초라하고 보다 더 추악한 것으로 재편하면서까지 자신의 실책을 덮어버리려 해서 는 안 된다. 차라리 지나간 사랑은 봉인해야 옳다. 입을 다무는 게 낫다. 마치 처음 포옹을 하던 그 순간처럼,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온전히 포갬으로. (83)



24.10.21.
서리북 15호 완독. 아카키와 바틀비와 잠자를 비교해보는 글쓰기를 흥미롭게 보았다.
















아카키는 우리 주변에서 더러 마주치는, 자족적이고 평온하고 바로 그 때문에 음산한 일 중독자의 느낌을 준다. 정서 실력도 나쁘지 않아 해고될 위험도 없으니 일체유심조,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북국의 추위(자연환경)와 만년 9급 관리(사회적 지위)와 빼앗긴 외투(속된 물건) 등 환유의 굴레를 씌우고 삭막한 정조에 붙박아 둔다. "그까짓 외투 때문에!"라고 말들 하지만 외투 자리에 다른 것을 넣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박찬욱, 《헤어질 결심》) 요컨대 외투는 그 본질상 한시적인 우리의 삶을 일순간이나마 유의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고갱이 같은 존재다. (261)

물론, 인간이 인간이기를 멈추고 벌레가 되는 순간 비로소 인간다움을 응시하게 된다는 역설이 「변신」을 관통한다. 흡사 아카키-유령이 아카키-인간보다 더 생기로운 것처럼, 말없이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정서만 하던 바틀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면벽 공상에 빠져 있는 바틀비가 더 인간다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필경사는 책상 앞에 앉아 정서할 때, 영업사원은 구매자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 때 비로소 사회적 자아를 실현한다. 자,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빡빡한 인간-영업사원의 삶과 온종일 방바닥과 벽과 천정을 산책하는 인간-벌레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살아 있음에 가까운가. (266)

소설의 화법과 문체를 고려하더라도 그 자체로 어딘가 특이한 아카키, 바틀비와 달리 잠자는 너무나 평범한 인물이다. 주인은 저 파놉티콘처럼 존재하는 척만 해도 노예가 알아서 제 몸을 채찍질한다. 한편 주인은 주인대로 '법 앞'의 말단 문지기처럼 '피로 사회'(한병철)의 엄정한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을 소진한다. 「외투」와 「필경사 바틀비」가 주인-사회와의 충돌에서 도드라지는 노예-인물의 개성적 성격에 주목한다면, 「변신」은 평범과 정상과 상식과 중치의 육화인 인물을 덮친 비극의 보편적 부조리를 강조한다. 잠자의 오묘함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즉, 잠자는 그저 '인간 아무나'고 그 '인간 아무나'는 누구나 하루아침에 벌레가 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 끝으로 요제프 K의 "개 같군!"이라는 마지막 탄식을 변주해도 재밌겠다. "영락없이 말똥구리 신세군!" 언제 읽어도 아리송하고 격하게 웃긴 이 느낌, 카프카적인 것(Kafkaesque)'이 참 좋다. (267-268)















『소설가의 일』 읽기. 외숙모의 시에서 출발해 어머니의 뉴욕제과점을 지나 매일 쓰는 작가로 넘어가는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 감탄하며 읽었다. “매일매일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뒤에 나오는 휴게소의 인사기계에서 재능으로 넘어가는 부분도 필력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결국 재능은 인사기계처럼 가짜를 만들 뿐, 소설가를 대신해서 써주지는 않는다는 것. 결국 쓰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으면,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라는 그 문장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루스트 씨는 그때 뭔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뭐든, 내가 이해하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든, 그는 뭔가를 썼고, 그의 시간은 11권의 책으로 남았다. 소설가의 일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일생 앞에서는 다작이라는 말도 무의미하고, 수면용 소설이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12)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19)

휴게소에서 인사기계를 마주 보고 서 있을 때, 검은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티모시가 외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그 검은 집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소설가에게 재능이란 인사기계나 기도기계 같은 것, 그러니까 마치 나 대신에 소설을 써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설기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호두과자기계와 다른 종류의 기계다. 재능이라는 소설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기계 역시 소설가의 죄책감이나 꺼림칙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고안된 기계다.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도 죄책감이 없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23)

처음 소설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는 무엇도 감각하지 못하는 영혼과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 감각하려고 애를 쓴다. 그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쓰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조금씩 소설 속의 세계는 작가에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초고는 그렇게 쓰여진다. (33)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내가 찾아내려고 하는 건 디테일이다. 우리말로는 세부 묘사라고 하는데, 소설에서는 세부 정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질투심이 강한 여자였다"라는 관념에 세부 정보라는 빛을 쪼이면 소설의 문장이 나온다. 질투심이 강한 여자의 눈빛은 어떻게 생겼는가?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언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가? 소설의 문장이라는 건 이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러니 소설가가 시놉시스를 쓰거나 줄거리 요약을 하거나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게 아닌 셈이다. (35)

이야기는 이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낀 주인공이 자신에게 없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때 생겨난다. 예컨대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미녀에게 첫눈에 푹 빠진 은행원이 있다고 치자. 평상시처럼 졸고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래서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가 단번에 차였다. 이때 은행원이 그 미녀의 해골을 상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소설이 망하는 거지. 그러니까 소설가는 이 세상이 더 많은 번뇌망상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아무튼, 어딘가 좀 비뚤어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소개한 공식이 기억나는가? 감각적으로 구성된 캐릭터에게 욕망을 부여한 뒤에 방해물로 그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저지하면 이야기가 발생한다던 그 공식. 이걸 불교 경전 식으로 말하자면, 고생길이란 보고 듣고 느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불우해진 중생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간절히 원하건만 세상의 갖은 방해로 그걸 얻지 못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니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생고생(하는 이야기) (40)


24.10.22.
















도서관에 남아있는 한강 작가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 읽기. 첫 단편인 「회복하는 인간」부터 작가의 도장이 진하게 찍혀있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했지만 혈연이어서 보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치부와 수치심에 대하여. 까닭도 모르게 혈연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끝내 남은 상처가 낫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설움에 대하여 생각해본 시간.

『소설가의 일』 읽기. 소설 쓰기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쉽고 물 흐르듯 쓴 책이 있었나 싶다. 작법서를 따로 찾아 읽은 적은 없지만. 작가의 영업 비밀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느낌. ‘왜’ 상자와 ‘어떻게’ 상자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생고생이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장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다는 걸 아는 순간, 구멍에 불과했던 단순한 욕망은 아름다운 고리의 모양을 지닌 복잡한 동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47)

그러므로 현대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설사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안 속에서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에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50-51, 강조는 인용자)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사춘기가 지나면서 우리 인생도 조금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거나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살지는 못한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간다. 해서 무기력은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다. 그런 무기력의 양대 산맥이 바로 현대 연애와 암 선고다.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일이 현대소설의 본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결국 현대소설의 윤리는 불안을 이겨내고 타자와 공존하는 그 용기에 있는 셈이다. 이 용기는 두번째 그룹의 개들과 마찬가지의 처지이면서도, 그러니까 모두들 안 된다고 말하고, 또 자신부터가 여러 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설 때 비롯한다. 용기는 동사와 결합할 때만 유효하다. 제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용기가 될 수 없다. (52-53)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수많은 백스토리와 인물을 포함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은 동기다. 언제나처럼. 그렇다면 이 삶도 마찬가지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54)

하지만 질문은 독창적일 필요가 없다. 그저 상자 두 개를 상상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양손을 이 상자 두 개에 넣고 ‘왜?'와 ’어떻게?'가 쓰여진 카드를 꺼내기만 하면 우리는 소설 창작의 절반을 한 셈이다. 눈치챘을지 모르 지만, '왜?'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백스토리가 된다. 이 백스토리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떻게?'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디테일이 된다. 이 디테일은 플롯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백스토리와 디테일을 갖추면, 그 어떤 인물도 악한이 될 수 없다. (60)


24.10.23.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다 읽다. 하와이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세 여성이 겪는 풍파가 가득한 서사가 끊이지 않아 순식간에 읽게 된다. 인물들의 굴곡진 삶에 나도 함께 감정의 파도를 타며 읽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전형적인 이민자 소설에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버들의 자식들의 목소리에서 다른 소설과의 구별점을 찾았고, 특히 정호-데이비드의 말은 내가 청소년소설을 읽을 때 가지던 예상을 깨는 말이었다. 현대로 치면 세대 갈등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영화 《도쿄 소나타》의 형이 미군에 입대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장면이 떠오른 건 왜일까?

24.10.24.
한강의 『노랑무늬영원』 마저 읽기.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개만 보았을 때는 단편의 순서가 많이 달라졌다. 오늘 읽은 건 「에우로파」, 「밝아지기 전에」, 「왼손」. 「파란 돌」을 읽다가 멈춤.

「에우로파」에서 눈에 띄는 내용은 화자의 성 정체성과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얼음으로 뒤덮인)에 대한 노래이지만, 정체성의 혼란, 사랑과 동일시를 오가는 감정의 외줄타기, 서로 다른 이유로 마음에 새겨진 상처들을 우회하며 오가는 대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진한 감정의 발자국을 남기며 독자를 이끈다. 단편들을 쭉 읽으면서 이 작품들에서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들이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 상처와 감정의 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골똘히’라는 부사가 잘 어울린다.

「밝아지기 전에」__화자의 삶과 은희 언니의 삶을 나란히 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일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내면의 상처들을 품고 살며 상대방의 삶에서 자신에게 없는 것 같은 단단함을 보는 삶. 서로의 막연한 꿈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을 읽어내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는 서로에 대한 존중.

「왼손」__무의식에 내재된 다양한 (금지된) 욕망을 왼손이 의식을 거스르며 실행해나가는 과정은 공포스럽고 놀랍기도 하지만, 자기파괴적인 결말을 포함해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4.10.25.~26.
『노랑무늬영원』 읽기. 「파란 돌」의 뒷부분을 마저 읽고 「노랑무늬영원」을 이틀 동안 읽음.

「파란 돌」__한강 작가의 소설 속 화자들의 목소리는 왜 이리도 다들 말로 다 표현하기도 어려운 설움을 목소리에 꾹꾹 눌러담고 있나. 어느 순간 삶의 어떤 고비를 겪은 화자가 어린 시절 잠시 마주쳤던 당신께 보내는 편지. 인생을 놓고 보면 잠깐이었지만 강렬했던, 상처 많은 두 사람이 잠시 서로에게 기대었던 이야기.

「노랑무늬영원」__중편 분량의 작품. 소설집의 작품 중 가장 먼저 발표된 작품. 여기까지 읽으니 작품의 정조가 대체로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몇 가지 모티브가 반복되기도(길거리에서 차를 몰다 동물을 치게 되거나 혹은 칠 뻔하거나 하는 이미지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읽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을 전공했으나 차사고로 양손 모두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화자. 사고 이후로 사랑이 메말라 결혼 생활도 껍데기만 남아버리고, 투명해지고 기민해진 감정과 감각만 남아버린.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진의 존재에 관련된 기억을 쫓아가며 잠시 스쳐갔던 사랑의 감정을, 지금은 메말라서 없어진 사랑을 찾아보려는 몸부림처럼 읽혔다. ‘노랑무늬영원’이라는 학명을 가진 도마뱀의 강렬한 색채, 그리고 화가 Q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노랑의 이미지. 마지막에 화자가 손으로, 세계가 힘을 빼앗아버린 그 손으로 찍어내는 노랑. 노랑이 작품 전반에 넘실거린다. 다만 잔멸치의 떼가 나타나는 꿈은, 그 꿈의 반복은 무엇이었을까.

『소설가의 일』 1부 완독. 요약하자면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 ‘왜’ 상자와 ‘어떻게’ 상자, 빈도수 염력사전(적확한 어휘 찾기), 그리고 핍진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소설은 주인공의 동기를 파헤치는 장르다. 그런 점에서 현대소설은 추리소설의 일부다(라고 우기는 건 내가 추리소설이야말로 소설 중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3)

사실 『주홍색 연구』는 코난 도일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뒤에 쓴 추리소설에 비해 단점이 많이 지적된다. 예컨대 나를 매료시킨 동기 부분이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결함이다. 추리소설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이 부분이 너무 길다. 코난 도일이 동기 부분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당대의 소설들이 이런 식으로 '현재의 괴기한 사건 + 그 사건의 동기를 말하는 기나긴 멜로드라마 + 괴기함 속에 숨은 자연적 질서를 이해하는 결말'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도 이런 식으로 추리소설로 재구성할 수 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한 의사 부인의 끔찍한 음독자살 + 왜 마담 보바리는 불륜에 빠져서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됐는가 + 어떤 부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을 보바리즘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결말.' (64)

나는 사랑이란 행동이 아니라 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방에 대해 더 구체적인 정보를 더 많이 알아내자면, 그의 행동을 지켜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알수록 우리는 더 빨리 사랑에 빠진다. (70-71)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쓰는 게 소설가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제일 바깥쪽을 추상적이고 큰 단어들, 예컨대 평화, 정치, 슬픔, 절망 따위의 단어들이 단단하게 감싸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구체적이고 작은 단어들이 숨어 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쓸 때. 우리는 대개 제일 바깥에 있는 단어들로 글을 쓴다. ‘5월을 보내는 마음이 슬프다'느니, ’그녀는 질투심이 많다'느니. 자기가 쓴 초고를 보면 누구나 약간의 구토증세를 느끼는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우주가, 아니,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좀 쓸 만한 단어는 그런 너저분한 단어들을 뚫고 가야 나온다. (75)

즉 소설가에게는 두 개의 상자가 있다. 각각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사가 들어 있는 상자들이다. 세계를 감각하는 인간이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 생고생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만든 뒤, 이 상자 속의 의문사들을 하나씩 꺼내 붙이면 질문이 완성된다. 이건 쉽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어떨까? 이제는 빈도수 염력사전을 펼친다. 염력을 이용해서 가능하면 뒤쪽 페이지에 있는 단어와 표현 들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건 한 번에 쉽게 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사는 우주는 가만히 놔두면 삐딱해지는 곳이라고. 지구가 기울어진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추상적인 대답이 나온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생각의 힘을 이용해서 빈도수 염력사전의 뒤쪽에 있는 단어들로 바꿀 생각을 하면 되겠다. (76)

만약 자기가 쓴 초고를 봤는데 토할 것 같다면 그건 소설가의 일거리, 즉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건 뱃살이 생기거나 방이 더러워지는 일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우리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뱃살이 나왔다고 난 원래 배불뚝이로 태어난 것이라며 절규하거나, 방이 더러워졌다고 왜 나는 사는 방마다 더러워지느냐고 좌절하는 사람만큼이나 이상한 게 처음 쓴 문장이 엉망이라고 재능을 한탄하는 사람들이다. 단번에 명작을 쓰고 싶다면, 시간이 갈수록 방이 깨끗해지는 우주에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77)

이런 이유로 소설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핍진성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방해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한다. 핍진성은 소설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다. 소설가는 구체적인 문장을 넘어서 핍진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많은 독자들이 내게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핍진한 문장보다 구체적인 문장이 더 좋아요'로 이해한다. 물론 구체적인 문장만 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구체적인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해해주기를. 지금 나는 허구의 세계를 문장으로 창조해서 실제 감동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플롯을 짜는가가 모두 이 핍진성에 기초한다.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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