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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님의 서재

일想 다섯. (2022년 3월 2일~8일)


  (이직은 아니고) 근무지가 바뀌었다. 이제 일주일하고 절반이 지난 지금, 새로운 일과 환경과 사람에 적응하느라 애쓰는 중이다. 아예 신입의 마음가짐이었다면 백지장과 같은 상태이니 일의 방식을 그대로 흡수하면 되련만, 이미 새겨진 리듬과 방식과 관습이 새로운 것과 만나 삐그덕거리고 맞춰나가는 하루가 계속되는,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는 시기이다. 때로는 새로운 방식이 구태의연하고 비효율적이고 지나치게 형식적이어도 내 것을 고집하고 관철하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극강의 I인지라 하루하루 퇴근을 하면 뻗어버리고 말았으니... 주간이었던 목표는 월간이면 다행일 수준이 되었다. 환경 적응은 아직 진행형이고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그렇다고 책읽기를 마냥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시도는 하고 있는데, 읽고 있던 책더미를 잠시 방치하고 3월에 처음 집은 책은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이었다. 계절과 기념일이 오고 지날 때 관련 있는 책을 떠올리기는 해도 읽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 편이나, 이번에는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올해 목표였던 책들도 잠시 멈춰두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입시를 위해서 반, 흥미 반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들의 역사를 연도별로 줄줄이 정리할 수 있었던 한국사 덕후는 시간과 망각의 풍파에 이젠 몇 개의 키워드들로만 역사의 흐름을 기억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3.1운동 역시 마찬가지여서 2.8 독립선언과 민족대표 33인,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단어들만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의 초반부가 보여주는 3.1운동의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미주와 참고문헌을 제외하고도 560쪽에 달하는 이 노작에는 '3.1운동'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그날의 삼라만상들이 담겨있다. 3월 1일에 인파를 보며 조선이 이미 독립이 된 줄 알고 함께 만세를 불렀던 수많은 사람들, 대한제국과 군주제를 떠올리게 했던, 정작 3월 1일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태극기가 대중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가는 과정, 각양각색의 동기로 대표를 자임했던 3.1운동의 비체계성과 역동성, '만세'라는 구호에 담겼던 수많은 입장들과 목소리들까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역동적인 봉기의 터전이 공화주의라는 사상의 공론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상과 언어가 무르익을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면서도, 비극 속에서 행동과 선언의 장이 갖는 강렬한 힘이 3.1운동을 빛나게 하기도 한다. 1부를 읽으면서 1919년 세계의 정세, 그리고 쉽게 지나쳤던 '대표'나 '만세'가 가졌던 의미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어 좋았고,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무게와 두께가, 그리고 휘몰아치는 3월이 나를 붙잡고 있지만...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이 작금의 정치 상황이 미친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일이면(글을 쓰다보니 오늘이 되었다) 달라져 있을 한국의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3.1운동의 광장에서 보았던 역동성의 기억을 잃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조금이나마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품는다. 이미 5년 전에 광장은 그 힘을 다시 보여주었고, 그것은 1919년의 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연표의 한 줄로만 남더라도 그 한 줄에 새겨진 수많은 얼굴들과 목소리가 쉽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었으면 한다...




[곁가지들]














역사를 생각할 때 연표와 그 순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를 중심에 두는 우리의 시간관 때문일까?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보는 트랄파마도어의 역사관은 푸네스처럼 수많은 목소리들을 기록하는 역사관일까? 인과성보다 합목적성을 우선에 두는 헵타포드의 역사관은 어떨까? 문득 연표로 집약되는 역사관이 역사 속에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제5도살장》과 〈네 인생의 이야기〉 속 외계인들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그러면 또 결국 추상과 구체라는 화두로 돌아오는 것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이쯤에서 꼬리를 접기로 한다...





3·1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3·1운동의 얼굴은 여럿이다. 하긴 그토록 많은 이들이 3·1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역시 식민권력의 인구통계 약 1,600만을 적용하면 전 인구의 3.7퍼센트에서 6.2퍼센트 정도가 된다. 이후의 어떤 사건도, 1960년의 4·19혁명이나 1987년의 6·10 민주화운동도 그만한 참여도에 이르지 못했다. 3·1운동 때는 교통·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 P11
3·1운동 당시 언어는 이렇듯 수행적이었다. ‘선언‘이라는 말 그대로 그것은 미래를 당겨쓰는 방법이었으며, 목표한 미래를 일궈내려는 자기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청원과 선언 사이에서 고심했지만 3·1운동의 대중은 ‘선언‘의 급진성을 최대치로 고양시켰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조선이 독립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 18세 청년 채만식에 의해, 그리고 그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나두 만세! 만세!"를 외쳤던 촌로에 의해─그런 사람들에 의해 「기미독립선언서」의 선언은 (준)독립의 현실을 길러내는 생산적 모태가 되었다. 독립의 선언이 곧 독립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믿음이야말로 3·1운동의 비밀이다. ‘와야 할 현실‘을 ‘도래한 현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언명령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감염시킴으로써, 3·1운동의 대중은 그 스스로 새로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P51
그러나 ‘독립‘은 민족적 불만의 해소 이상을 가리킨다. 3·1운동기의 구호, ‘독립만세‘ 혹은 그 축약형으로서의 ‘만세‘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만세‘는 불만의 승화이자 희망의 표현인 동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축원하고 환영하는 기호다. ‘만세‘로써 축원하는 ‘독립‘의 새 나라는 따라서 단순히 대한제국의 귀환일 수 없었다. 그 새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였는가? 100년 전 두 달여 동안 한반도를 휩쓴 군중 경험에서 참여자들 각자는 대체 어떤 뜻으로 ‘독립‘과 ‘만세‘를 불렀는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3·1운동 당시 ‘만세‘와 ‘독립‘은 민족해방으로 소진되지 않고 계급 이동으로 다 해소되지 않는 미정형의 유토피아적 충동을 표시한다. ‘만세‘가 저마다의 불만과 희망을 표현했듯 ‘독립‘은 그런 불만과 희망이 해결된 미래상을 지시했다. 인민은 고통스런 현실이 철폐되길 소망했고 현재의 부조리를 보상할 만한 새 나라를 꿈꾸었다.- P125
김원벽의 말마따나 고립된 단어로서 ‘만세‘의 의미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도시 공간 및 학교 제도 밖의 거주자들에게 있어서 ‘만세‘는 낯선 용어이기도 했다. "만세의 뜻도 모르면서 (…) 따라서 불렀을 뿐"이라는 발뺌이 적지 않았던 터다. 3.1운동 당시 ‘만세‘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오해했다는, 혹은 그런 차이를 알리바이 삼는 진술은 종종 발견된다. 예컨대 동아등자회사 직공이었던 25세의 김흥수는 3월 1일 "3,000명쯤의 사람들이 ‘만세, 만세‘하면서" 지나가기에 까닭을 물었으나 돌아온 것은 웃음뿐이라 어리둥절했다고 기억한다. 전남 영암의 면서기로 국장 구경차 상경했던 유인봉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는 만세시위를 목격하고는 "전혀 까닭을 몰랐으므로 자꾸 (…) 물었으나 (…) 만세를 모르면 몰라도 좋다고 하면서 만세를 부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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