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본 서평을 쓰기 전에 이런저런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웹으로 조금 구경해봤고, 저자의 다른 책에 대한 주변의 평가도 조금 알아보기도 했다. 보통 이런 수고 어지간하면 잘 안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그랬던 이유는 개인적으로 그만큼 박헌영에 대해, 그리고 이 책에 대해 읽고 난 후에도 어떤 갈증이랄까, 그런것이 남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의미에서 본서에 대한 평가가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그리고 내가 찾아본 서평에서는 굉장히 야박한 것 같다는게 다소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해방정국의 한반도에서 동원가능한 거의 유일한 정당이었을법한 정당의 수장에 대한 읽어볼만한 평전이 쓰여졌다는 점 그 하나만으로도 본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다시피, 해방정국에서 한국전쟁까지가는 과정 속에서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사는 비단 박헌영 한사람 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중도좌파까지만 커버하던 기존의 대중적 연구분야(?)에서 적어도 '공산주의자'부분에 있어서는 최초의 그럴듯한 출판물이라는 점, 아울러 박헌영의 일생이, 그러한 남과북 모두로부터 금기시되는 좌익인사의 일생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어 보인다.(참고로 본서는 말미에 박헌영 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함께하다 비슷한 행보를 걷게 된 수많은 좌익인사들이 전쟁이 끝나고 어떻게 사라져갔는지를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 책의 백미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정말 영화보다 낭만적이고 신화적이고 비극적이랄까.) 후처와 후처의 자식들은 전부 소리소문없이 함께 숙청당하고, 조선 여성 공산주의자의 대표주자였던 전처는 소련에서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당하며 전처의 딸은 그런 사정조차 모른채 스탈린주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고, 남한에 유일하게 남은 아들은 스님이 된 기구한 사정은, 어찌보면 해방 이후 한반도의 기구한 운명을 투사해 보여주는 것 같기까지 하다.
사실 학부시절 현대사를 처음 접한이후 지금까지, 개인적으로는 외세에 의해 해방이 되는 바로 그 순간, 한반도의 분단은 유예는 할 수 있으되 막을 수 없는 필연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아울러 깐깐하고 샌님같은(김일성은 그를 '리론가'라고 종종 비꼬고는 했다)뿐만아니라 소극적이고 심지어 살짝 수줍음까지 타는 듯한 박헌영의 성격은, 상황이 어떻게 되건간에 당내 경쟁에서 김일성에게 밀릴 수 밖에 없는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박헌영이 한반도 공산주의자의 수장으로, 아니 외세의 조금 더 유연한 대외전략에 따라 남한의 공산주의자 정당에 수장으로 남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그의 비대중적 성향, 무엇보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교조적인 성향은 공산당이 해방정국 이후 더이상 커가는 데에는 분명히 방해요인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박헌영의 공산당이 남한에 설령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탈리아 공산당같은 유연함과 그에 따른 세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처럼 적어도 70년대까지는 지식인들의 보호막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노동자들의 최후의 보험으로, 지식인들의 방탄막으로 자신의 역사적인 소명을 다한채, 조용히 평화롭게 역사의 한페이지에 기록될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 흐름 속에서 적어도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평등하고, 조금 더 민주적으로 변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어느 교조적인 좌파정당이 의도한 것이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건 말이다.(물론 친일지주들이 모여만든 극우적 여당과, 무산계급의 친구...도 아니고 아버지(그것도 폭군같은!!)를 자처하는 스탈린주의적 제1야당이 타협없이 죽도록 치고박고 싸우다가 죄다 공멸했을수도 있겠다마는)
사실, 해방정국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어떤 이론가도, 외교관도, 운동가도, 군인도 아닌 바로 '정치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자신의 이념을 내세우며 그 이념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는 해방정국의 상황은, 그 이념적 분열성과 함께 필연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전쟁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그것의 결과가 설령 '분단'이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건 전쟁없이 평화적으로 타협해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와 '정치인'이었다. 그런의미에서, 어찌보면 모두 '정치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평면적인 해방전후의 인물들 중 박헌영은 조금 혼란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분명 교조적이고, 종종 무리수를 두는 결단과 그에 기반한 정세파악을 하여 일을 그르치곤 했지만, 때때로 마키아벨리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해방전후 정국에서의 마키아벨리적인 행보는 이후 그를 고난에 빠뜨리는 한 원인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정작 내가 박헌영을 평가하는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다.
ps. 끝으로 살짝 여담. 서평을 쓰면서 '잘 모르는 데 이렇게 막 써도 되냐'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가 해방전후사 연구에 대한 질적인 논쟁을 하기 이전에 연구의 양부터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마주서게 한다. 연구자의 이념적 정향을 떠나서라도 이 부분에 대한 어느정도 진지한 연구가 양적으로라도 좀 늘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