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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4868911님의 서재
  •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
  • 13,320원 (10%740)
  • 2020-06-10
  • : 2,119


"성과주체는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에 자유롭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가 그의 심리 상태에 본질적 계기가 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명령이나 금지가 아니라 자유와 주도권이 그의 실존을 규정한다. 성과의 요구는 자유를 강제로 전도시킨다. 타자 착취가 가고 자기 착취가 온다. 성과주체는 아주 쓰러져버릴 때가지 자신을 착취한다. 폭력과 자유는 하나로 합쳐진다. 폭력은 자기관계적인 성격을 얻는다. 착취자는 피착취자다. 가해자는 동시에 피해자다. 

성과주체는 자유와 강제가 분간할 수 없게 된 긍정성의 폭력에 지배당한다." (p137-8)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을 때 마음 속 깊이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뭐라도 해야하는 거 아닐까?’ ‘아무리 직업이 보장되는 한의대에 다닌다고 해도 이렇게 살다가는 뒤쳐질 것 같은데’ ‘남들은 다 앞서나가는데 나 혼자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자기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런 날 밤에는 쉽게 잘 수 없다. 분명 나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같은 심리상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사회는 ‘자기계발’의 사회라고 총칭할 수 있다. 조직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계속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한다. 시험 점수, 자격증, 인턴 경험, 연구활동... 끊임 없는 성과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 가치를 보존시킨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게 왜 문제야? 열심히 살면 좋은 거 아니야?” 이런 질문에 작가 한병철은 ‘시스템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성과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은 자유를 보장받고, 주권을 갖는다. 그들은 법이 정해놓은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적 폭력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성과를 내야만 인정받는, 돈으로 환원되어야만 가치를 얻는 사회 속에서 개인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 ‘자기 착취’를 한다. 그리고 목적은 너무도 ‘긍정적’이어서 그것이 착취라고 느낄 겨를도 없다. 성공하기 위해, 조직에서 인정 받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하고 발전한다는 느낌에 이끌려 몸을 내던진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은 자신 스스로가 성장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긍정성’의 폭력에 휘둘려 개인은 착취당한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 착취의 끝은 결국 정신적 소진상태로 도달하고, 우울증, 자기혐오와 같은 정신 질환으로 악화된다. 


한병철 작가가 지적하는 ‘시스템적 폭력’은 오찬호 작가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자기계발’에 미친 지금 세대들은 자기 착취를 통해 자기 혐오에 빠진다. 그리고 자기혐오는 타인과의 성과 경쟁에서 이겨야만 잠시나마 극복될 수 있기 때문에, 미친듯한 경쟁을 불러 일으킨다. 서울대와 연고대를 가르고, 서울대 속에서 상경과 비상경계를 나누고, 서울대 경제학과 내에서 학점으로 학생들을 가르는... 그런 끝없는 피라미드 속에서 개인들은 서로를 착취하며 타인들을 배제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 속에서 시스템적 폭력은 ‘성과, 성취, 발전, 성장’이라는 긍정성에 가려져 폭력이라고 인지할 수 없게끔 너무도 잘 숨겨져있다. 


사실 나 또한 이러한 시스템적 폭력의 피해자다. 어떠한 성과, 장학금, 성적, 성취를 내기 전까지는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성과에 의해 잠시나마 올라가는 자존감은 진정한 자존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쉬기만 해도 귀중한 나의 존재 가치 (제의가치)를 아직까지도 쉽게 인정할 수 없다... 나조차도.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 폭력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인식하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성장의 덫이 낳는 힘겨움과 거부감을 더이상 나의 ‘나약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지. ‘성장과 발전’이라는 긍정성의 폭력에서 허덕이는 대한민국의 20대들에게 <폭력의 위상학>을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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