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소년들이 많을까? (p.17)
나는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너무 단정적인 어투였나. 하지만 언제나 적응하지 못 한 채, 두 세걸음 동떨어진 존재라는 생각을 수십 년 달고 살았다. 겉으론 웃고 어울리고 있어도 괴리감은 발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린 모두 거의 항상 자신이 괴물이라고 느끼니까요. (p.252)
앤 카슨은 캐나다의 문예지 <브릭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게리온의 괴물성에 매료되어 이야기를 썼다고 밝힌다. 나의 괴리감 역시 그 괴물성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멍청이, 게리온의 형은 그렇게 말하고 가버렸다.
게리온은 멍청이라는 말에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정의가 실현되면
세상은 무너진다. (p.33)
난 네가 싫어. 상관없어. 엄마한테 말한다. 무슨 말?
학교에서 아무도 너 안 좋아하는 거.
게리온은 잠자코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사실들이 더 크게 다가온다. (p.39)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닫는 건 언제부터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지 못 할 때가 아닐까? 너무 우월해서 아니면 열등해서, 어느 쪽이든간에 그 사실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면 '괴물성'은 실체를 갖게 된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내적인 것은 내 거야. 그는 생각했다. (p.39)
그날은
그가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게리온은 이 작품에 내적인 모든 것들을
특히 자신의 영웅적 자질과
공동체에 큰 절망을 안겨줄 이른 죽음에 대해 썼다.
외적인 것들은 멋지게 생략했다. (p.40)
하지만 옮긴이 민승남의 말처럼 '괴물성'은 몰개성의 잿빛 바다에서 빨강으로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 '특별한 것' (p.252)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차이는 특별하다. 그리고 고유성이 그로 부터 탄생한다. 게리온은 자신의 괴물성에 영웅성을 스스로 부여한다.
게리온은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지요?
<중략>
게리온이 해피엔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나요?
게리온은 행동을 멈췄다.
그러곤 팔을 뻗어 선생님 손에서 작문 종이를
조심스럽게 빼앗았다.
그는 교실 뒤편으로 가서 늘 앉던 책상에 앉아 연필을 꺼냈다.
새로운 결말.
온 세상에 아름다운 빨강 바람들이 계속해서
불었다 손에 손잡고. (pp.55-56)
그리스 신화에서 게리온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괴물로, 게리온을 죽이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하나였다. 앤 카슨의 소설 속에서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의 연인이자 그를 화산으로 데려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화산은 소설 속에서 게리온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게리온 내면 역시 마치 천천히 흘러가는, 그러나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용암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 문제의 뜨겁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게리온의 모든 갈라진 틈에서 혀를 날름거렸고
그는 그것들을 억누르면 초조한 웃음을 흘렸다. (p.65)
그러나 무엇보다, 붉다는 것. 온도에 따라 색은 달라질 수 있지만 '붉음'으로 대표되는 용암의 이미지는 게리온의 빨간 날개와 통한다. '빨강'은 게리온의 특별한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의 특별함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 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마저도.
너도 '빨강 인내' 봤지, 그렇지? 난 그 사진을 부엌에 건 게 못마땅해
거기선 너무 어둡거든
사람들은 그걸 흑백사진이라고 생각하지 물론 요새 사람들은 사진 볼 줄을 몰라.
아뇨 전 용암을 봤어요, 용암 맞나요? (p.103)
너한테 꿈 얘기 하려고 나 어젯밤에 네 꿈 꿨다. 그랬어? 응 네가 늙은 인디언이 돼서
뒷베란다에 서 있고
계단에 물통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 물에 빠져 죽은 새가 있었어---
큰 노랑 새였지 진짜로 컸어 (p.104)
노랑? 게리온은 그렇게 물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노랑! 노랑이라니! 그는 꿈에서조차
나에 대해 전혀 몰라! 노랑이라니! (p.104)
사랑하는 존재와 나 사이의 무지만큼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건 없다. 그러나 그런 잔혹한 사실과 마주할 지라도 사랑이 바로 끝나진 않는다. 게리온 역시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을 지라도 헤라클레스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검고 무거운 것이 벨벳의 냄새처럼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p.67)
그들은 서로 닿진 않았지만
같은 육신 위 평행하게 베어진 두 개의 상처처럼 놀라움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p.67)
게리온은 항상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그리고 '시간'과 '거리'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묻는다.
"거리가 어떻게 보이는가?" 단순 솔직한 질문이다. 거리는 공간 없는 내면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의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다. 그건 빛에 의존하다. (p.64)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p.128)
그날 그는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꼬리가 벽에 닿는
달빛 없는 수족관 속에서
떠다니는 고래들을 생각했다 --- 시간의 끔찍한 비탈의
그들 자리에서
자신처럼 살아 있는 고래들.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요? (p.144)
'거리'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p.152)
시간은 덩어리이자, 움직임에 부여된 의미이다. 거리 또한 늘 변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서로를 지켜볼 뿐이다. 사진은 빛이 없다면 찍을 수 없다. 그리고 빛의 움직임을 찍기 위해선 장시간 동안 카메라 셔터를 열고 있어야 한다.
재밌구나. 네가 아기였을 때 불면증이 있었는데
기억나니? 밤에 네 방에 들어가 보면 넌 아기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었어.
눈을 크게 뜨고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울지도 않고 그러고 있었지. (p.60)
신화에서 영웅은 타고난다. 시련은 영웅을 더 강하게 만드는 과정에 불과할 뿐, 그의 영웅성은 천성적인 것이다. 게리온도 타고난 영웅이었으나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자신 안의 영웅성을 깨닫고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화산으로 데려갔지만, 그를 화산 속으로 진정 인도한 건 '앙카시'였다.
이건 앙카시를 위한 거야. 그는 아래로 멀어져가는 땅에 대고 외친다.
이건 우리의 아름다움의 기억이다.
그는 태고의 눈에서 모든 광자들을 쏟아내는 이칸티카스의 흙으로 된 심장을 내려다보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사진 제목은 '사람들이 간직하는 유일한 비밀.' (p.242)
게리온은 앙카시를 만나 숭고한 여정의 시작이자 끝을 향해 간다.
앙카시는 불을 바라본다.
우린 경이로운 존재야.
게리온은 생각한다. 우린 불의 이웃이야.
서로 팔을 맞대고,
얼굴엔 불멸을 담고, 밤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시간이 돌진하고 있다. (p.244)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괴물은, 나를 고유하게 만드는 동시에 외롭게 만든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거리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비록 닿을 수 없는 존재일 지라도, 우린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기에 눈을 감는다는 건 위험하다. '실체에 대한 열정'으로 앤 카슨은 스테시코로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보는 것은 하나의 본질'이라고.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불완전한 파피루스 단편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다시 재창작한 스테시코로스의 단편들을 기반으로 한 '빨강의 자서전'도 챕터 간에 단절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가 되면 격리된 듯한 챕터들이 실은 견고히 이어져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파편을 하나씩 모으다 보니, 결국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완성된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시로 쓴 소설>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한 문장 한 문장이 품고 있는 서정적 아름다움이 생생한 이미지와 결부되어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나는 말(言)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거트루드 스타인-
약동하는 말(言)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간다. ‘빨강의 자서전, 시로 쓴 소설’은 그런 말들로 가득 차 있다. 말들이 스스로 하는 말을 본 자가 그대로 적어 내려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