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를 읽는 날은 금요일이다.
차분하고 성실한 아이라서 이전에 하던 대로 문제풀이 시간을 가져도 되지만, 독서록 쓰기도 연습하면서 책 읽는 시간을 가져야겠는데, 시간은 짧고 할 내용은 많다 보니 아무래도 얇은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의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건 어려울 수 있겠지만, 평생의 바로 그 책, 혹은 평생의 바로 그 책 중의 하나를 소개할 수는 있으니깐. 그래서 고른 책이다.
로이스 로리의 책 중에서는 『A Summer to Die(그 여름의 끝)』를 제일 좋아한다. 가슴이 쿵쾅쿵쾅 『Number the stars(별을 헤아리며)』는 매번 감탄을 일으키는 책이다. 그래도 로리의 책을 한 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로리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그녀의 작품 중 하나를 추천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고를 것 같기는 하다.
한 번에 두 챕터씩 읽고 독서퀴즈 정도는 아니지만 해당 내용에 관한 문제를 푼다. 같이 읽은 후에 문제를 풀면서 답을 적어보고 감상을 쓰고 이야기를 나눈다. 21세기의 미래 교육 현장답게 영화 예고편을 보여 주면서 박보검처럼 착하게 잘생긴 조너스의 운명을 같이 예상해 본다. 다 읽으면 좀 더 긴 영상을 보여 주겠다. 이제 네 책이 생겼으니 담주까지 다 읽어와라. 짬짬이 꼬셔본다.

여러 번 읽었던 책을 질문지를 뽑기 위해 다시 읽다 보면 새롭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sameness에 대한 강박. 내가 사랑하는 철학자 마리 루티는 지독하게 가난한 핀란드의 국경 마을에서 자랐다.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박사 과정에 더해 교수까지 될 수 있었던 건,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 치과의사의 딸과 동일한 교육 과정을 밟을 수 있는 북유럽의 공교육 덕택이었다고 그의 책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에 썼다. 교육은 공고한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마지막 혹은 유일한 사다리로 작동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불안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제일 염려하는가. 노인으로서의 삶과 죽음 직전 노후의 삶이다. 이제 자식은 이전 세대처럼 노후를 보장하는 보험이 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돈을 자식으로 삼는다. 돈과 자식이 같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둘 중 하나라면 이젠 자식이 아니라 돈을 선택한다. 돈이 더 확실하고 예측 가능한 패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각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하며, 행복한 가정의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사회적 책무를 마친 노인들이 행복한 여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면, 그런 사회는 이른바 유토피아라 불릴 것이다. 주인공 조너스가 사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이다.
하지만, 저자는 마냥 행복해 보이고, 보이는 규약과 보이지 않는 질서로 유지되는 그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관심을 갖는다. sameness에 빼앗긴 인간 삶의 행복과 생명력에 대해 말한다. 로이스 로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다. 실패하더라도 계속할 자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
평등에 끌리는 나는 자주 혼란스럽다. 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이제 40대가 아니라 50대에 가까워지는 나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에 태어나 폭주하듯 성장한 한국 경제의 혜택을 받은 나는, 여전히 불공평함, 불공정에 마음이 끌린다. 평등한 사회를 꿈꾼다. 차이와 차별이 공고하지 않은 사회를 꿈꾼다. 하지만, 질서로 유지되는 사회, 규제로 조정되는 사회, 감시로 완성되는 사회는 이미 실패했다. 유발 하라리는 전체주의 실험국 소련의 실상을 『넥서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한 마디로 모든 농촌의 모든 가구를 콜호스(집단농장)에 가입시킨다는 생각이었다. 농촌 주민들은 토지, 집, 말, 소, 삽, 쇠스랑 등 모든 재산을 콜호스에 넘겨야 한다. 이들은 콜호스를 위해 함께 일하고, 그 대가로 콜호스는 주택과 교육에서부터 식량과 의료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또한 콜호스는 모스크바의 명령에 따라 농부들이 양배추를 재배할지 순무를 재배할지, 트랙터에 투자할지 학교에 투자할지, 누가 낙농장, 제혁소 또는 병원에서 일할지도 결정한다. 이렇게 하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벽하게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가 탄생할 것이라고 모스크바의 기획자들은 생각했다. (249쪽)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하기에는 소련의 영토는 너무 넓었고, 인구는 많았고, 체제는 예상보다 오래 지속됐다. 농민들은 소와 말을 콜호스에 넘기느니 차라리 도살하는 쪽을 택했고, 공동 소유의 밭을 갈 때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250쪽). 내 것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농장에서 아무도 내 일처럼 애쓰지 않았다. 스탈린주의 정권이 개인 소유 가족 농장의 해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건 가족의 해체였다. 아이들에게 스탈린을 진짜 아버지로 공경하고 친부모가 스탈린이나 공산당을 비판하면 고발하도록 교육했다(256쪽)
조너스가 살고 있는 세계는 비슷한 듯 다르다. 지적인 능력과 성격, 취향을 고려해 배우자로 선정된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룬 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아이가 배정된다. 세 사람의 생활이 안정을 찾은 후에 다른 성별의 아이가 추가로 배정된다. 아이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생물학적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른 채, 지정된 여성과 남성을 엄마, 아빠로 생각하면서 평생을 산다. 만들어진 가정. 조합된 가정. 완벽한 핵가족 신화에 걸맞은 가족이다. 이런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가정은 이 세상 모든 불평등의 출발점이자 마침표다. 누가 내 엄마인가, 누가 내 아빠인가에 따라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 가정 경제는 한 가지 성의 희생으로 완성된다. 그게 가부장제다. 알바 갓비는 『친밀한 착취』에서 "우리는 재생산의 중심이자 욕구의 사회적 세계로서 가족이 꼭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268쪽)"라고 썼다. 여성의 해방, 진정한 여남 평등의 종착지가 자주 가정 해체로 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는 가정에서 자란다. 제 손으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질적인 필요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네 편이야,라는 사람을 적어도 한 명은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꼭 원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랑 함께 있는 그곳은 '가정', '집'이라 부른다는 뜻이다. 루시가 윌리엄을 'home'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혹은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모든 차이를 삭제한 조너스의 사회에는 갈등이 없다. 조정이 없다. 타협이 없다. 정해진 규칙이 있고, 규약이 있고, 법이 있고, 처벌이 있다. 질서를 최우선으로 하는 조너스의 사회는 탄탄하고 안정적이지만, 그곳은 흑백의 세계다. 생명력이, 기쁨이, 사랑이 제거된 사회다. 반면에 조너스가 환상으로 만나는 과거의 기억,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은 생명력과 함께 억울한 죽음이, 기쁨과 함께 우울이, 사랑과 함께 혐오가 공존한다. 계속 말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고, 조정해야 한다. 싸워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그리고 원치 않는 사람과 가끔은 손을 잡아야 한다. 이를테면, AGI가 인간에 맞서려고 할 때. 인간은, 중국과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손을 잡아야 한다.
12.3 계엄을 앞두고 비상계엄 특별 방송이 자주 보인다. 보았던 영상을 다시 보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서 창문이 열린 곳이 있나 다시 한번 집을 둘러봤다. 내 말에 반대하면 간첩이고, 국회 입장할 때 박수 안 쳐주는 사람들은 반국가세력이라 말했던 사람이 혹시나 다시 석방되면 안 될 텐데.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었는데도 내란 청산이 여전히 지지부진해서 마음이 답답하다. 무식자의 전체주의 꿈은 아스러졌는데, 왜 우리는 아직 제자리인지 모르겠다.
겨울밤이 길다. 밤이 깊어서 길고, 오후에 커피를 마셔서 길다. 『넥서스』를 읽으면서 내일을 기다려야겠다.
아침, 내일의 아침을 기다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