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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풍경
  •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 이병한
  • 16,650원 (10%920)
  • 2025-06-20
  • : 15,549



집을 워낙 좋아해서 내가 '집사람'이라고 자주 놀리는 사람이 듣는 강의에서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야기하러 나온 사람이 책을 썼다는 걸 알게 됐다. 유튜브에 강연이 여러 개 있어서 그걸 들어도 되지만, 영상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정말이요?) 굳이 책을 찾아 읽는다.

내 글에 진지한 소중한 친구는 글에 '정치'를 묻히지 말라고 했다. 정치 묻히기 좋아하는 내게는 참 시의적절한 충고가 아니라 할 수 없겠다. 나도 그러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는 내게 중요한 '문젯거리' 중의 '문젯거리'여서, 나는 자꾸 정치에서 멈춰 선다. 이야기하다 보면 자꾸 진영논리로 가게 되고, 손바닥에 왕자 새겨진 걸 다 보고도 윤석열에게 투표한 사람을 약 올리고 싶은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그 어떤 사회적 제도나 문화보다 훨씬 더, 정치는 더 적극적으로, 더 직접적으로 우리 삶을 통제하고 규율한다. 내 삶을 제한하는 그런 강력한 권한을 '누구'에게 양도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내겐 그렇다.

2024년 12월 3일 밤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갑자기 생각난다. 나도 모르게 퍼뜩 떠오른다. 만약 그 밤에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민주당 의원들과 일부의 국힘 의원들의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 정족수가 부족했다면. 특전사 707 부대가 5분 먼저 진입해 국회 전체를 단전시켰다면. 일부, 아니 단 한 명의 군인이라도 흥분한 상태에서 국회 내부에서 공포탄을 발사했더라면. 수도방위 사령부 담당관의 서울 상공 진입 불허 때문에 작전이 40분 이상 지연되지 않았더라면.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반팔 위에 패딩을 입고 택시 타고 달려온 시민들이 국회를 에워싸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않았더라면'이 그 반대의 힘으로 '그러했기에' 결국 비상계엄은 해제되었다. 그 이후에도 위기는 계속되고 있어 한 고개 지나면 또 한 고개. 그 고개 지나면 또 한 고개의 지루한 시간들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윤석열의 집권이 계속되는 세계, 윤석열의, 정확히는 김건희의 정적들이 제거되는 세계는 그 힘을 잃었고, 지금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산다. 국민 주권의 실현이, 그 이상적이고 원대하며 고상한 비전이, 우리에게는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현실 속에, 그 이상 속에 산다.

우리의 실천이 성과로 우리에게 닿을 수 있었던 건 '국민 주권'이라는 대의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무력마저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대통령도, 대통령마저도(대법관들 정신 차려라! 이 나라는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시킨 나라다. 니들이 뭐라고!!!!!!!!!!!!) 헌법과 법률을 위반할 경우, 절차에 따라 탄핵될 수 있다. 국민들에게 동의 받지 않은 권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에서는 정치가 아닌 경제의 힘을 믿는 이들, 즉 일군의 사업가들이 앞으로 미국의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될 거라고 예측한다. 그때의 권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고, 국민들에게 동의 받지 않은 권력이며, 그럼에도 국민들을 종속시킬 수 있는 권력이다. 세계 최초의 인터넷 은행 '페이팔'의 창립자 피터 틸, '테슬라'와 '스페이스 X'의 일론 머스크,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의 CEO 알렉스 카프, 트럼프 2기 부통령 J.D. 밴스(알라딘 책소개)가 바로 그들이다.

저자는 이 그룹의 리더를 피터 틸이라고 보았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후, '나는 게이지만 트럼프를 지지한다'라고 말했던 피터 틸은 2025년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 트럼프의 좌우를 모두 틸의 사단으로 채워나갔다. 좌-밴스, 우-머스크.

체스를 사랑하고,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너무 많이 읽어서 세세한 내용까지도 외우던 소심한 소년 피터 틸은 스탠퍼드 대학 2학년 때, 본인이 편집장이 되어 <스탠퍼드 리뷰>를 창간했다. 편집진은 모두 백인 남자였다.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이들 12명의 남자들은 술 마시고, 대마초를 피우고, 여학생들을 쫓아다니느라 바쁜 신좌파 대학생들을 멸시하면서, 지-덕-체 함양에 힘썼다. 이후 실리콘밸리의 교주로 등극한 틸은 좌파의 문화전쟁 때문에 미국의 미래가 지체되었다고 주장했다.(66쪽) 피터 틸을 비롯한 이들 4인방이 추구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첫 번째 창업이었던 페이팔부터 틸은 기술과 정치의 결합을 추구했는데, 이는 중앙정부를 통하지 않는 금융혁명의 시작이었다. 대반동 시대의 개막은 틸의 집에 모였던 소수의 사람들 중 커티스 야빈의 『암흑 계몽』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는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주고 그 후 민주주의를 배양한 계몽사상에 대한 비판(76쪽)이다. 이른바 신반동주의다.

신반동주의는 일국일제, 즉 일국가 일체제도 부정한다. 일국사회주의만큼이나 일국자유주의도 배격한다. 그들이 보기에 모든 현대 국가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독재국가다. 오로지 하나의 이념과 체제를 국시(國)로 강제하기 때문이다. 고로 일당제와 양당제와 다당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중국은 공산주의를 강요하고, 미국은 민주주의를 강제한다. ... 군웅이 할거하는 유사 봉건적인 도시국가 시스템을 국민국가 이후의 질서로 모색하는 것이다. 각각의 작은 도시국가가 하나의 기업처럼 작동한다. 위로는 CEO 군주를 앉히고, 아래로는 일종의 주주로서 주민 사회가 작동한다. 군주는 주주=주민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하여 도시를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들은 다른 유능한 군주=CEO가 다스리는 도시로 이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의 거래와도 비슷하고, 유튜브 시장의 구독 모델과도 흡사하다. (77쪽)

'무엇이 진짜 미국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 새롭게 창조된 미국의 이상이 서구, 백인, 남성, 엘리트,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들, 극히 소수의 남성들의 담합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럴 것으로 보인다. 거짓말쟁이에, 깡패처럼 협박을 일삼는 트럼프는 이런 남성들에게 선택된 사람일 뿐이다. 정치에 개입한 경제 세력은 그들이 가진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데이터를 무기로 새로운 미국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세상은 투표 없는 세상일 수도 있겠다. 『1984』와 『멋진 신세계』 실사판이 가까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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