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의 책은 이 책까지 3권을 읽었고, 품절이 걱정되어『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를 미리 구매해 두었다.
처음 마리아 미즈의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페이퍼에 3번 정도 썼던 것 같은데 그래도 다시 인용해 보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47쪽이다.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47쪽)
머리에 띵~~하고 충격을 주었던 지점은 바로 여기다. 여성으로서 사는 내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내가, 여성혐오 문화의 자장 속에 갇힌 내가, 몰카 천국에서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내가,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을 착취하는 억압 과정의 공범자라는 사실이. 이걸 인정하고 현재까지의 공모 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마리아 미즈의 말이 내게는 너무 무거웠다.
손으로 만든 레이스를 사는 서구 여성들은 레이스 노동자들의 처지를 전혀 몰랐고, 자신의 사치품이 극도로 열악한 노동 조건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착취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82쪽)
서구의 여성들은 집안을 장식하는 도구로서 레이스를 인식한다. 레이스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다. 질문은 현재에 와닿고, 그에 대답하기는 항상 곤란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이미 제1세계에 속한 나라(비상 계엄으로 마이너스 30년 되긴 했지만) 아닌가. 일단 최근까지의 무역량, 경제 규모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는 제1세계가 분명하다. 우리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물품들은 제3세계 지역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빼앗은 대가로 얻어진다. 우리는 그 '많은 물건'들을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으로 사용한다.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이 모두 다 그렇다. 남성의 여성 착취, 서구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착취, 백인의 유색인종 착취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이러한 제1세계의 제3세계 '착취'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이에 대한 마리아 미즈의 해답은 '자급'이다. 가능할까. 한국에서, 서울에서, 우리 집에서.
•필요한 식료품 일부는 구매하지 않고 직접 생산한다.
•공동 기반 위에서 생산한다. 그 결과 새로운 공동체 또는 이웃이 생긴다.
•토지는 사유 재산이 아니라 공유 재산이다. 소유관계 대신 사용권이 존재한다.
•정치적 적대감은 공동체 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자급은 단결시키고 돈은 분열시킨다!
•자존을 책임지고 자선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커뮤니티 텃밭 농부들은 자급이 결핍이 아니라 풍요로운 삶임을 경험한다. 좁은 땅에서도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거둘 수 있다. 이는 생산물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다. (211쪽)
제일 주요한 부분은 직접 생산과 공동체 활성화일 것이다. 근교의 작은 텃밭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서 '수확이 너무 많아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던 나로서는 마지막 원칙, 자급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를 100% 믿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 집에서 가능한가'라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 크다. 생산 활동을 통해 자급하기보다는 소비를 줄이는 것, 먹는 양을 줄이는 것이 훨씬 더 접근하기 쉬운 방법임을 안다.
최근에 읽은 한겨레 21의 <헌 옷 추적기>는 실천할 수 있는/실천해야 하는 하나의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한겨레21: https://h21.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6674.html)
<한겨레>는 헌옷에 추적 장치를 달아 이 옷들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추적했다. 153점의 의류에 바느질로 옷에 추적기를 달았다. 추적기를 단 옷을 의류 수거함에 버렸다. 대도시의 의류들은 중소도시의 의류 수출업체로 보내졌다. 인천항, 평택항으로 이동한 뒤,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타이, 볼리비아, 인도네시아, 페루, 일본으로 보내졌다.
사진은 인도 하리아나주 파니파트의 도심 인근 주차장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옷들이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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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작 직후, 1년간 옷 사지 않기를 결심했었다.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나름 잘 실천했었는데, 2024년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옷을 꽤나 구입했다. 좋은 옷이란 어떤 옷일까. 예쁘고 체형을 보정해주고 단정해 보이고 편안한 옷. 그런 옷을 찾는데 여러 번 실패했고, 그래서 다시 구입하게 되는 악순환을 경험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것도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패션리더가 되었던가. 설마, 그런 일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2회독을 마치면서, 실천을 목표로 했던 항목이 있다. 육식 절제, 유제품 절제, 탈코르셋, 전기를 비롯한 모든 에너지 절약 그리고 옷 사지 않기. 할 수 있는만큼은 해보려고 <오늘의 결심>을 여기에 써둔다.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제1세계의 '여성'에 대해서, 여성 간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해서, '정체성 정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정리해 두려고 한다.(미래를 기약하는 스타일)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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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는 이후 여성 운동으로 확산해 내가 지금까지 대표하는 종류의 정치를 대학에서 제거했다. 이런 정치적 지향의 전환은 내가 떠난 후 사회과학연구소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공통점, 즉 가부장제 · 식민주의 자본주의라는 조건 아래 착취와 억압을 경험한 데서 비롯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중에 페미니즘 정치(특히 포스트모던 정치)의 초점은 여성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기독교인인지 무슬림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였다.-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