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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풍경












일단 목차를 살펴보자면.

살펴봐야한다. 왜냐하면, 현재상태 품절이고 근처 도서관, 3개구 20여개의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는 책이기에, 소중한 책이기에. 목차부터 살펴봐야한다.

1부 식민주의들

1장 세계를 상상하기

2장 지식과 권력

3장 권력의 경관

2부 포스트-식민주의들

4장 새로운 질서?

5장 코카콜라인가 메카-콜라인가?

글로벌화와 문화 제국주의

3부 포스트식민주의들

6장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7장 포스트식민 문화

8장 안락의자를 떠나며?

제목에 걸맞게 포스트 식민주의와 지리에 관련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공간감각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가 어려워서 설렁설렁 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유럽인들은 다른 민족과의 조우 과정에서 그들을 괴물 인종으로 묘사한다. 방점은 유럽인과의 차이(35쪽)였는데, 비교함에 있어서 기준점은 언제나 유럽인이었다. 옳고 정상적인 상태의 유럽인과 그러지 않은 다른 민족을 비교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이드(1978: 72)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인은 '그에 상응하는 유럽인에 대해 대칭적이지만, 항상 그들과 정반대로 열등한 존재이다'. 서구 사상사에서 차이에 대한 분류학은 '다르지만 동등한' 존재를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서구 사상은 이분법적 쌍에 가치를 부여함에 있어서, 항상 어느 하나에 다른 하나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했다. 어떤 경우에는 서양의 가치가 정의되고, 동양은 그것으로부터 이탈됨을 의미했다. 또 다른 경우 서양의 가치는 보편화되어 어떤 행위의 '유일한' 길로 정의되고, 그것에 상당하는 동양의 대립물은 단순히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44쪽)

남성과 여성,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탈식민주의 공부의 시작점은 양쪽으로 구분된 두 개념이 동일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걸 이해하는 데 있다.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다른 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남자가 아닌 성'이다. 서양에게 있어 동양은 '서양이 아닌 모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희진쌤의 말을 그대로 가져 온다.












이분법은 반반으로 분리된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dichotomy)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 젠더(gender)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33쪽)

같은 이야기를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썼다.












섹스/젠더, 자연/문화가 그런 이원론에 포함된다. 한쪽을 특정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다른 쪽을 규정하는 매우 세부적인 사항과의 차이에 의존한다. 다른 것과 구별되며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위치 혹은 대상은 독특함과 우월성이라는 의미의 측면에서 부차적인것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보다 열등한 것, 즉 자원으로 낙인찍힌 쪽 없이는, 보다 위대한 것, 문화의 비범한 특질인 쪽도 자신이 이야기하고 규정하는 것, 자신이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없다.(『도나 해러웨이』, 61-2쪽)

왼쪽, 그러니까 남성과 서양, 유럽인과 식민지배인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여성과 동양, 유럽 외 지역의 모든 피억압자들은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열등함의 범주에 갇혀 버리게 된다. 남성/인간/문명/서양/백인은 위대하고 비범한 존재로, 여성/동물/자연/동양/유색인은 열등하고 평범한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서구 유럽이 스스로를 창조했다는 것이고, '나 이외의' 모든 세계에 대해 '비도덕적이다' 혹은 '미신적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힘을 서구 유럽이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찾아봐야겠다 했던 건, 표지의 이 사진 때문이었다. 얀 반 데르 스트라에의 <아메리카>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배인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옷을 제대로 차려 입고 서 있는 남성과 벗은 몸으로 누워 있는 여성. 침략자이며 계몽 군주를 자처하는 서양이 위풍당당한 남성의 모습으로, 자연이며 미개를 상징하는 동양(혹은 피식민지)이 나른한 모습의 여성으로 투영되어 있다.


책 속의, 사진 설명에서는 '아메리카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의미로 이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얀 반 데르 스트라에의 <America>를 검색하다 보면, <그 사람 콜럼버스가 아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로 밝혀져...> 이런 속보를 접하게 된다.




주의해서 보고 싶은 부분은, 옷 입은 남성과 옷 벗은 여성의 사이,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사람들이 모닥불에 뭔가를 굽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하반신... 평화롭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들은 반드시 미개한 풍속을 갖고 있을 거라는 유럽인의 망상, 기대, 희망이 이런 방식으로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현장이다.

광고 속에서 만들어지는 식민주의적 관점과 건축과 도시 건설이 권력의 경관을 만들어가는 과정,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에 대해서도 잠깐씩 언급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일단 스킵하도록 하자. 투어리즘에 대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 이제 당당한 제1세계의 일원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외국을 '여행한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자본주의, 소비주의와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백미라고 한다면,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부분인 듯 싶다.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정당화하며 자신들의 침략/침공/전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인도의 소설가이자 정치 활동가인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2002)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전쟁의 핵심은 탈레반 정권을 와해시킴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부르카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달리 말해 미국 해병대는 페미니스트 미션을 수행 중에 있다는 주장을 믿도록 요구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나 남아시아의 일부 지역과 같이 여성이 심각하게 학대받고 있는 다른 지역들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렇다면 '그들'도 폭격되어야 하는가? 델리, 이슬라마바드, 다카도 파괴되어야 하는가? 인도를 폭격하여 그러한 (여성에 대한) 극심한 편견을 없애 버리는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목적을 통해 페미니스트의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만들 수 있는가? (201쪽)

저자는 이것이 '여성 무슬림을 둘러싼' 베일의 정치politics of the veil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여성주의책 같이읽기의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어서, 그 글의 링크를 여기에 붙여둔다.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명예살인과 히잡,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789788)

가부장제에 따른 억압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체제, 인종, 계급의 요소가 교차해서 이중 혹은 삼중으로 자신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음을 제3세계 여성들이 소리 높여 외칠 때, '여성 먼저'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인종주의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없을 테고, 자신의 계급을 완벽하게 부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테지만, 그 모든 혼돈과 혼돈의 해결을 그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을테니 어떤 식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큰 지혜와, 가끔은 그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해본다.

반납일이 재깍재깍 다가오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아 생각만큼 잘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이만큼이라도 정리했다는데 의의를 둔다. 나는 자주, 나를 후하게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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