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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근간으로 한 판단이 '신화' 혹은 '오해'일 수 있다는 생각은 최근 읽은 버섯책 <세계 끝의 버섯>에서도 확인된다. 성교를 통해 번식가능한 '종'의 범위가 변화무쌍하게 변환되는 현상 혹은 현실. 큰 덩어리의 염색체 전체에 도입되는 이종교배와 완전히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다배체화 또는 염색체 복제도 공생화의 일면이다.


성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 대한 논고.

성차는 특이한 종류의 차이이다. 왜냐하면 성차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 사이의 차이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공간(여기서 정체성 또한 발생한다)을 유일하게 열어주는 존재론적 불가능성(섹슈얼리티 속에 함축된)으로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성차 개념에 연루된 이러한 존재론적으로 결정적인 부정성은 정확히 이 성차 개념이 "젠더 차이" 개념으로 대체되면서 상실된 것이다.(75쪽)

그 뒤의 문단에서는 이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게 더 어렵고. 하여 일단 여기까지 써 두고.

그 다음에 성차와 차이가 같이 등장할 때는 라캉의 도표와 함께 온다.

성차는 그 모든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배치하는 데 있는 차이이며, 이 모든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세 기능으로서의 팔루스 기능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그 마이너스이다. (다음 도식은 라캉 2006c에서 가져온 것이다.) (101쪽)



이 도표에 대한 설명은 그만두고. (그만 둘 수 밖에 없음. 당최 무슨 말인지....) 오른쪽 아래 부분을 설명하는 부분에만 밑줄을 그어본다.

첫째, 여성은 "성적관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 의미에서 타자"이다(Lacan, 1999, 81). 그리고 둘째, "타자의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의 타자라도, 남성은 여성의 타자가 아니다. 타자의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 타자는 타자의 성으로서의) 타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다음의 역설적 공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타자이기 때문에, 여성은 저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다"(ibid).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관계는, 말하자면 그 타자 안에 포함된다. 그것은 타자의 "부분"이다. (106쪽)

당최 알 수 없는 말들을 다 뒤로한다. 나는 밑줄 긋는 나마저 기특해하기에. 이제 프로이트에게 간다. <죽음충동 1: 프로이트>.

죽음충동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던 저자 알렌카 주판치치는 물리학자 김상욱과 비슷한 주장을 이어간다. 즉, 생명은 무생물에 어쩌다 생긴 어떤 것으로서, 무생물에서 일어난 하나의 우연(189쪽)이라는 것이다. 우연적 상태, 무생물 자체의 단순한 도착이자 이상한 쾌의 상태로서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며, "성충동들"은 쾌락원칙과 무생물로 회귀하려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벗어나려는 유일한 충동들(192쪽)이라는 설명이다.

라캉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오자. 죽음이 생명보다 더 일상적이며, 생명이 죽음보다 더 ’특이한‘ 상태인 걸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이 생명의 소멸, 생명의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는 걸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은 이미 생명 안에 내속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197쪽)

라캉이 ’모든 충동은 잠재적으로 죽음충동이다‘라고 했을 때, 성적충동의 중심에 위치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충동이며, 모든 부분적 충동들 역시 죽음충동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런 뜻이라 이해한다.











『How to read 라캉』에서 슬라보예 지적은 '죽음 충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How to read 라캉』, 259/555)

상상계-상징계-실재계는 너무 어려워보여 '죽음충동'만이라도 이해해 보려 했으나, 실패.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 상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여기저기 검색하며 찾아본 바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제자들도 이 '죽음충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이 매우 편안해지고.












죽음충동을 설명하기 전에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살의의 양가감정'에 대해 설명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우치다의 『유대문화론』 뒷부분에 자세히,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언젠가, 마음이 여유롭고, 심심하고, 손이 근질근질해질 때, 찾아보리라 다짐한다.


아래 사진의 제목은 <엄마와 책>이다. 추석 연휴에 백화점에서 식사하고 커피 한 잔 마시러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이다. 저 때는 도서관 책으로 읽고 있었고, 후에 내 책을 사기는 했지만, 왓이즈섹스 사진 중에서 나는 이 사진이 제일 좋다. 왓이즈섹스의 왓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지만(하긴 뭐, 누가 밝히라고 나한테 그런건 아니고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즐거운,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를 조금은 배운, 배운 듯한 ㅋㅋㅋㅋㅋㅋ 유익한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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