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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풍경












『세계 끝의 버섯』을 읽고 있다. 많이 읽었고, 조금 남았다. 열심히 읽고 계신 분들, 뽜야!!

지난번에 다락방님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고 다락방님이 대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그 대화가 자꾸 생각났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첫 어절은 삶이. 두번째는 엉망이. 세번째는 되어갈. 네번째는 때.

삶은 종종 엉망이 되어간다. 엉망의 기준은 다 가지각색이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모든 것을 가진 듯 해도 자신의 삶이 엉망이라 느낄 수 있고. 특별하지 않은 삶, 부족한 것이 많은 삶 속에서도 '이정도면 괜찮다'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원하는 삶의 모형이 안분지족과 안빈낙도는 아니지만, 100%의 충족과 만족이 불가능한 욕망을 마냥 날뛰게 할 수는 없기에. 삶 속에는 부족함으로 인한 아쉬움, 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지난주 토요일에 다리미 아내로 변신했을 때, 정희진쌤의 매거진 <공부>의 7월호 <"내가 말했던 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다" - 푸코의 '담론'>을 들었다. 말의 물질성에 대한 부분이 좋았다.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들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이미 2번 들었음), 그 에피소드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이 성경 구절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


여기에서 '말씀'이란 발화로서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창조 이전부터 함께했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로 찾아오셨다.


기독교는, 그리고 그 뿌리가 되는 유대교는 특히 말이 중요한 종교이다. 신심이 깊으신 우리 엄마는 부정적인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하시는데, 엄마의 근거 역시 성경 말씀이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장 28절)


나도 모르게 툭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을 때, 엄마는 득달같이 달려와 혼을 내시면서 내게 '취소!'를 요구하신다. 동의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취소!'를 외쳤던 나. 정작 엄마가 되자 아이들이 부정적인 말을 할 때, 엄마처럼 '취소'를 외치고 있더라는. 이를테면, 시험을 잘 못 보고 왔을 때. 몇 개 더 틀린 정도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못 보고 왔을 때, 아이들은 쉽게 '망했어."라고 말한다. '망했어'는 우리집에서 용납되는 단어가 아니다. 취소! 망했어! 그래도 그런 말하면 안 돼! 망했다고, 진짜로! 그래도 안 돼! 망한게 어딨어, 다음에 또 잘 보면 되지. 다음에 잘봐도 안돼. 아무튼 취소! 취소해! 취소!를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우주로 뻗어나간 그 말이 진짜 취소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끝까지 우리 엄마처럼 행동한다. 나는 '망했어'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하는 엄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데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망한 것처럼 느껴질 때.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마음. 도대체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해결책은 너무나 멀어보이고. 문제의 해결이, 상황 타개가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그런 순간. 그럴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이 문장이 좋았던것 같다. 가끔, 우리의 삶은 엉망이 되어 간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 이런 고통, 난관, 역경이 순간이 아니라 기본값이라는 것. 인생은 곧 고통의 연속.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 그럴거라는.

송이버섯은 심하게 교란된 숲에서만 자란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일본 중부에서 짝을 이루며 서식하는데, 둘 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행해진 곳에서만 자란다. (102쪽)


심각한 산림 벌채 이후의 산. 민둥산. 허전하고 볼썽사나운. 엉망진창인 모습. 황무지처럼 버려진. 버려진 모습의 산. 그런 산에서 송이버섯이 자란다.

사피엔스가 지나는 골목골목마다 대형 포유류등은 멸종했다. 먹을거리 빼놓고는 모두 쓸어버리는 인간의 무자비함. 경작할 땅을 얻기 위해 산에 일부러 불을 내는 인간들. 숲 속 깊숙히, 더 안쪽으로, 안쪽으로 인간은 침략과도 같은 전진을 계속 이어가고, 인간의 손길,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은 어김없이 손상당하고 훼손된다. 하지만.

교란을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인문학자는 교란을 손상과 관련짓는다. 그러나 교란은 생태학자가 사용하는 개념으로,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고 항상 인간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일으키는 교란은 생태 관계를 유발하는 독특한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교란은 하나의 시작으로, 항상 도중에 일어난다. 즉, 교란이라는 용어에는 교란 이전에는 조화로운 상태였다는 전제가 없다. 교란은 다른 교란을 뒤따른다. 따라서 모든 풍경은 교란되어 있고, 교란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 용어의 범위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교란에 대해 질문하면서 풍경의 역학을 탐구하고 논의를 계속할 수 있다. 교란이 심각한지 아닌지는 뒤따라 일어나는 배치들의 재구성을 통해 해결될 문제다. (284쪽) ​


교란과 손상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인문학자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교란은 다른 교란을 뒤따른다. 즉, 이전의 상태 역시 안정적이고 완전한 상태라 말할 수 없다. 불확정적인 지금 여기의 응축이 바로 지금의 우리인 것처럼, 비인간도 자연도 그러하다. 교란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결국 엄마의 말이 옳다는 뜻일까. 망했어도 망한것은 아니며, 망했어도 다 망한 것은 아니라는. 망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망했다고 해서 다 포기할 필요도 없다는. 망은 망이 아니니 망이라 할 필요조차 없다는.



뭐야. 이 페이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삘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주의사항: 망은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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