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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에환장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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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존을 만나러 프린스턴에 갔을 때, 나는 그와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서 놓친 말들이 많았는데, 연로한 그에게 자꾸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도 없고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의 생각이 옳은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의 생각이 내 평생의 연구를 이끌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가 양자중력의 미스터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다는 내 생각을 말할 수도 없다. 이제 그는 지금 이 곳에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기억과 추억, 부재의 고통,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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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 부재는 아니다. 고통은 애정과 사랑에서 시작된다. 애정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부재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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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과 브라이스는 내게 정신적 아버지였다. 갈증에 시달리던 내가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원하고 맑은, 마시기 딱 좋은 물을 찾았다. 존과 브라이스에게 감사한다. 우리 인간은 삼정과 생각으로 산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을 때 대화를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피부를 스치면서 감정과 생각을 교환한다. 이런 만남과 교환의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교환을 위해 굳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있을 필요는 없다. 서로를 연결하는 생각과 감정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도 어렵지 않고 수십 년의 세월을, 어떤 때는 심지어 수세기를 건너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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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기본 문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냥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는 것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고양이는 우주의 기본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구 곳곳에서 불쑥 ‘등장‘하기를 반복하는 복잡한 것이다.

▪︎ 풀밭에 있는 청소년 무리. 이들은 무슨 게임을 할지 결정하고 팀을 짠다. 우리는 이렇게 했었다. 무리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친구 두 명이 차례로 팀원을 선택하고 홀짝 맞추기로 어느 편이 먼저 게임을 시작할지 정했다. 이 지루한 과정이 끝나야 두 팀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 전에 두 팀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어디에도 없었다. 팀을 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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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산에 오르면 흰 구름에 덮인 계곡이 보인다. 구름 표면은 하얗게 빛이 난다. 계곡 쪽으로 걸어가보자. 공기가 점점 습해지고 뿌옇게 흐려진다. 하늘은 이제 더 이상 푸르지 않고 어느새 구름이 듬성듬성 낀 곳에 다다른다. 선명한 구름 표면은 어디로 간 걸까? 사라졌다. 사라지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안개와 고지대의 깨끗한 공기를 구분하는 ‘표면‘ 따위는 없다. 아까 본 것은 환영인가? 아니다. 멀리서 보았던 광경이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표면이 그렇다. 단단한 대리석 탁자는 내가 원자 정도의 작은 크기가 된다면, 안개처럼 보일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세상 사물들이 ‘모두‘ 뿌옇게 보일 것이다. 산이 사라지고 평원이 시작되는 곳은 정확히 어디일까? 어디서 사막이 끝나고 사바나가 시작될까? 우리는 세상을 커다란 조각으로 잘라놓았다. 우리는 세상이, 중요한 개념들이 상당한 규모로 ‘등장‘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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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방치해둔 나무 더미를 예로 들어보자. 이런 나무 더미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가 아니다. 왜냐면 탄소나 수소같은 구성 성분들이 아주 특별한(‘질서 있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이 특별한 조합이 깨져야 성장한다. 아무가 불에 타면 이 결합이 깨지는데, 나무를 형성한 특별한 구조에서 나무의 구성 요소들이 분열하고, 엔트로피가 맹렬하게 증가한다.(불은 사실상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이다.) 그런데 나무는 스스로 타기 시작하지 않는다.무엇인가가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줄 때까지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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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도 유사하게 상호 뒤얽힌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합성은 태양으로부터 받은 낮은 엔트로피가 식물에 쌓이는 과정이다. 동물은 음식을 섭취하는 방식으로 낮은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엔트로피가 아니라 모두 에너지라면, 우리는 음식을 먹지 않고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의 네트워크로서 낮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을 여닫는 구조물이다. 분자들은 촉매처럼 공정들의 얽힘을 촉진하거나 반대로 억제하기도 한다. 각각의 모든 공정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은 서로 촉매작용을 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의 네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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