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를 워낙 좋아해서 고흐에 대한 책은 열 권이 넘게 읽었다. 그래서 그가 몇 년에 어디에서 태어나서 몇 살에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자기 화풍을 만들었는지, 각 시기별로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머릿속에 대략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이제 고흐에 대해 더 새롭게 알게 될 것이 없다 싶으면 그에 대한 새로운 책이 또 나와서 내 관심을 끈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제목만 보고는 고흐 그림에 대한 감상에 심리학을 빙자한 힐링 문구를 약간 덧붙인 책인 줄 알았다. 그리고 고흐의 삶은 워낙 드라마틱해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은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기 쉽다. 더구나 저자가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기에 내 불신은 더 커졌다. 그래도 고흐에 대한 책이라니 궁금해서 펼쳐봤는데,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 심리와 그와 관련된 심리학 개념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었다. 고흐는 이미 죽었으니 그에게 특정 시기, 특정 행동을 했을 때에는 무슨 심정이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책에서 말하는 고흐의 심리가 100퍼센트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고. 그러나 고흐와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에 대한 기록,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여러 학자들이 연구하고 저자 자신도 추론한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도 반영해서인지 나름 고흐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나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흐를 다룬 다른 책들에서보다 고흐와 테오의 인격적 결함을 많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고흐는 많은 콘텐츠들에서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갔던 외로운 천재로 그려지지만, 저자는 사실 고흐가 누구보다 남들을 의식했고 자기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려고 애쓰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도 종종 있었고. 몇 달 만났던 여자의 자매들이 그녀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그 자매들에게 폭력까지 썼다고 할 때는 고흐에 대한 애정을 놓을 뻔했다. 테오는 남들이 몰라주는 형을 혼자 믿고 지원해 지금까지도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자는 테오와 고흐가 서로에게 '알테르 에고(alter ego)', 즉 또 다른 자아로서 서로를 보완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테오와 고흐의 관계가 늘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밝힌다. 고흐는 테오의 안정된 삶을, 테오는 고흐의 재능과 안목을 시기했고, 테오는 고흐가 탐탁지 않아 하는 고갱(고흐가 고갱을 사실 그렇게 탐탁지않아 했다는 것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을 칭찬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고흐에게서 불안감과 열등감을 유발했다. 둘 다 인간이니 단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들의 단점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테오보다는 고흐에 가까운 상황인 나로서는 고흐의 이런 인격적 결함과 건강하지 못한 심리에서 내가 보여 괴로웠다. 나와 고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 무작정 그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래도 내 안의 약하고 병든 부분이 그라는 거울에 비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고흐의 심리를 진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흐가 어떻게 그런 병든 심리를 이겨냈는지, 또는 어떻게 이겨냈으면 좋았을지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 보자고 이야기한다. 고흐의 삶 속 여정과 그 과정에서 그린 그림들, 거기서 드러나는 심리를 이야기하는 부분에 비해 이 솔루션 부분은 짧고 단순하다. 하지만 그것이 고흐뿐만 아니라 내게도 처방전이 되어주었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 자체를 바꾸진 못할지라도, 그 현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단계로 가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힌트를 주었다. 그래서 온갖 힐링 문구에 회의를 느끼는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이 좋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고흐와 관련된 다른 책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웬만큼 유명한 작품들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본 작품들이 많았다. 그것도 개인 소장 작품들이 많아 이 작품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최근의 고흐 관련 논문들에서 새롭게 주목하고 연구한 작품들일까. 고흐가 만든 연작들을 같은 소재끼리 모으고 나란히 놓아 디테일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는 심리학자도 미술사학자도 아니고, 이 책에서 분석의 틀로 삼는 심리학도 '이런 개념이 있고 고흐의 심리에는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설명하는 정도다. 그래도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고, 다른 책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고흐와 주변 사람들에 관한 사실들도 알 수 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흐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저자가 고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솔루션을 귀담아 듣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고흐가 생각보다 연약하고 결함이 많은 인간이었다 해도 그는 결국 위대한 것을 이루어냈는데, 우리는 고흐가 듣지 못했던 솔루션도 얻었으니 지금보다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