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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안님의 서재
  •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
  • 유즈키 아사코
  • 14,220원 (10%790)
  • 2023-03-10
  • : 901
  제목부터 살펴보자. 한국어판 제목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은 흔히 쓰이는 환영 인사말 '신사 숙녀 여러분'을 살짝 비튼 것이다. 일본어 원제는 무엇이었을까? 직역하자면 '내친김에 신사분도(ついでにゼントルマン)'다. 이 제목을 이해하려면 작가 유즈키 아사코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ladies and gentlemen)'은 보통 번역하면 '신사 숙녀 여러분'이죠. 하지만 젠더 갭 지수가 세계 120위인 사회(일본을 가리킴)에서는 '여성 먼저, 그리고 내친김에 남성도'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영어 제목도 '신사 뒤에 오는 것에 지쳐서(Tired of Taking a Backseat to Geltlemen)'다. 그러니 한국어판 제목은 원제와 작가의 의도, 영어 제목과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세 언어 버전의 제목 모두가 가리키는 것처럼 이 단편집은 확실히 여성의 이야기를 우선시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다섯 편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고 여성의 일상과 꿈, 희망, 그리고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 이 단편집 속 여성들은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고 이념에 자기 삶을 바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힘들 때는 서로 도우면서 삶의 고난들에 맞선다. 나무가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자신을 지탱하고, 옆에 있는 나무들의 뿌리를 붙잡아 서로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그렇다고 이 책이 남성들을 아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남성,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살아가려는 남성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용사 다케루와 마법 나라의 공주」는 남성, 그것도 여성들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남성이 주인공이지만, 그는 결국 여성들에게 품은 적개심과 오해를 풀고 여성들에게 협력하게 된다. 「서 있으면 시아버지라도 이용해라」 속 주인공의 전 시아버지는 집안일에는 손끝 하나 안 대던 모습에서 변화해, 직장에 나간 주인공 대신 집안일과 육아를 맡으면서 주인공의 진정한 가족이자 우군으로 거듭난다. 「키 작은 아저씨」의 노조에 교수와 「Come Come Kan!」, 「아파트 1층은 카페」의 유명 작가 기쿠치 간은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기득권 남성이지만 여성들에게 훈계를 늘어놓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삶 속에서 스스로 변화한 덕분에 그들은 여성들과 공존하고 유대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여성이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힘도, 여성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도, 남성이 진정으로 여성을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되는 계기도 모두 성실한 일상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단편들 속의 여성 주인공들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면서 매일의 일상이 유지되게 한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먹여주고 낙심한 사람에게는 위로를 해주고 어려운 미션은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한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앉아서 받아 먹기만 하던 남자는 집안일과 육아를 하면서 아내와 며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고, 며느리에게 진짜 가족이 되어준다.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지켜주고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일상의 힘이다.

  일곱 편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소설 밖의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이런 일상의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외적인 조건이 뛰어나지 않아도 각자의 위엄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아기 띠와 불륜 초밥」의 아기 엄마는 고급 초밥집에 육아에 지쳐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해 손님들의 눈총을 사지만, 미식에 대해 누구보다 뛰어난 식견과 당당한 태도로 그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한다. 그 당당한 모습 덕분에 불륜 상대의 재력에 기대던 여성 손님들도 힘과 용기를 얻어, '이런 가게는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육아와 집안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곳이냐'고 불륜 상대에게 따지고, 불륜 상대의 고급 자가용이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집에 돌아간다. 「둔치 호텔에서 만나요」에서 주인공이 외모가 볼품없다고 무시했던 남자는 사실 육아에도 능숙하고 생활력도 강하며, 주인공보다 더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키 작은 아저씨」에서 부자들의 재력에 기대어 인생을 바꾸려고 했던 주인공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자신을 모욕하는 부자에게 당당히 맞섬으로써, 자신을 도우려 했던 부자들을 오히려 감화시킨다. 이들의 당당한 모습에서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은 다 고맙다'는 문장 하나에서도 작가가 가족을 위해, 다른 이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인다.

  작가 자신이 육아와 가사 노동에 익숙한지, 모든 단편에서 생활감이 진하게 배어난다. 그러나 어떤 단편도 구질구질하거나 우울하지 않다. 퍽퍽한 현실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씩씩하고 발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딱히 더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가족들과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즐겁게 놀고, 수유 때문에 거의 2년 동안이나 마시지 못했던 와인을 즐긴다. 그렇게 순간을 즐길 줄 아는 낙천적인 태도에 유머 감각이 더해져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이나 조력자에게 쉽게 퇴치되거나 풍자의 대상이 된다. 애니메이션에서 매번 복수하겠다고 외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지고 마는 악당들 같아 위험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들 때문에 괴롭더라도 그게 심각하거나 오래 지속될 위기는 아니기에 견딜 만하다.

  그런 데다 작가는 작품 속 현실에 판타지를 한 스푼 넣는다. 수십 년 전에 죽은 유명한 작가가 멘토가 되어 조언해 주고, 어렸을 때 즐겨 하던 고전 게임 속에 들어가 용사가 되는가 하면, 착하고 이해심 많은 부자들이 후원자가 되어준다. 이러한 판타지는 빵을 폭신폭신하게 만들어주는 이스트처럼 단편들 속 퍽퍽한 현실을 폭신폭신하게 만들고 동화 같은 분위기를 더해준다. 열심히 살아온 등장인물들에게 작가가 내리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물이 우리의 마음도 몽실몽실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용사 다케루와 마법 나라의 공주」에서 다케루가 겪는 모험은 함께 전철의 여성 전용 칸을 습격하던 남성 동지들을 버리고 여성들을 돕는 계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공주가 명예 대신 친구가 되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지만, 다케루는 그 전에도 남성 동지들에게 나름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케루가 용사임에도 게임 속 평범한 백성들에게 응원은커녕 닦달만 당하는 상황도, 그가 여성에 대한 오해를 풀고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게 된 것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인다. 애초에 습격을 주도한 사람이 다케루인데 남성 동지들을 내쫓아 줬다고 여성 전용 칸의 여성 승객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소위 '역차별'을 둘러싼 갈등을 깊이 살펴보기보다는 다케루 개인의 갱생과 인간애 회복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정작 중요한 논점은 회피해 다케루가 여성들을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 계기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이 단편집의 소설들이 따뜻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소설 밖의 현실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러한 현실을 씩씩하게 헤치고 나아가는 주인공들은 사랑스럽다. 소설 밖 우리에게는 그들이 누렸던 판타지가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당당한 태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자세는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단편집은 산뜻한 화이트와인이나 소박한 가정식처럼 뒤끝이 무겁지 않으면서, 맛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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