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내용을 보면 흔하고 익숙한 생활의 풍경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지로 풀어내는 방식이 대단히 독특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시의 재미를 새롭게 알려주는 시집이었습니다. 아내의 이야기, 동료의 이야기, 정년을 앞둔 자기 삶의 이야기들이 꼭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여운이 크게 남았습니다. 천천히 아껴 읽을만한 시집이었습니다.
밤이 잔다 뜬눈으로 잔다 누구의 꿈속을 다녀왔는지 슬픈 표정으로 잔다 돌아누우면 어느새 얼굴 앞에 있는 밤, 등이 구부정한 밤에서 낯익은 바람 냄새가 난다 등 쪽으로 손을 내밀면 좁고 굽은 골목들이 닿는다 흐릿하게 말하고 흐릿하게 대답하며 - P88
질문이 없는 것처럼 입을 닫고 있다 차는 줄 모르고 차게 되고 그래서인지 반복을 끝내지 않는 생각을 들추게 된다 여전히 탱탱하고 이곳과 저곳의 벽은 울린다- P100
정류장에는 무표정한 사람들이 어깨를 절묘하게 피하며 걸었다 버스가 오고, 사람들이 뭉텅뭉텅 사라졌다 텅 빈 곳에서 어항의 입 냄새가 났다 돌아서면 내가 뱉은 입김이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P102
혼잣말을 한다, 너는 세상에 없는 표정으로 있다 얼굴에는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표정이 언제부터 검어졌는지 모른다 검어야 좋은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어디를 갔었는지 알 수 없지만 너는 늘 돌아오는 중이다-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