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냥 티브이 앞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낄낄댔는데, 요즘은 내가 그 게임 참가자가 된 기분이었다. ‘반의반‘ 또 ‘반의반의반‘ 크기로 접힌 종이 위에 외발로 선 채 가족을 안고 부들부들떠는, 그렇지만 결국 살았다고 카메라를 보며 웃는.- P14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걸 배웠다.- P20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P21
‘네가 네 얼굴을 본 시간보다 내가 네 얼굴을 본 시간이 길어......알고 있니?‘
에반의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찬성이 에반의 입매, 수염, 콧방울, 눈썹 하나하나를 공들여 바라봤다. 그러자 그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걸까?- P62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P81
서글서글한 눈에 선의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화는 속으로 ‘아직 덜 실패한 눈...... 이라 중얼거렸다. 오래전 저 눈과 비슷한 눈을가진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자신도 가져본 적 있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P114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P117
질 나쁜 종이위로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 흔들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로 답한다. 그게 우리의 직업이었으니까.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P133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언제나 어색한 듯 자명하게 서 있다. 정확히 어떤색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1970년대 때깔 혹은 낙관적 파랑을 등에 인 채 코닥산 명도, 후지식 채도에 안겨 있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P151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P173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P190
그런 시간이 있었다. 사람 얼굴을 보려면 자연스레 하늘도 같이 봐야 하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세상의 높낮이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를 잃고 난 뒤 그 푸른 하늘이 나보다 나이든 이들이 먼저가야 할 곳을 암시한 배경처럼 느껴졌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시차를 유년 시절 내내 예습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그건 나이든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나보다 어리거나 내 또래인 이들에게는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믿었다.- P229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
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