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며 자식들만 바라보고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가 현진의 마음에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본받을 만한 부모는 없어도 우아하고 강인한 할머니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떠올리면 세상을 강단 있게 살아갈 용기가 조금 생기곤 했다.- P19
영실은 손녀가 사고를 쳤다고 해서 집에 있던 차림새 그대로 허둥지둥 달려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갖춰진 모습으로, 예의 그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풍기며 나타나주었다. 어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현진은 그날 알게 되었다.- P18
현진은 수경의 웃음이 달갑지 않았다. 한참 어린 여자애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미소였고, 그래서 조롱처럼 느껴졌다.- P24
영실은 줄곧 순응해왔다. 부모가 사라진 세상에, 책임질 생명이 탄생한 세상에, 남편이 사라진 세상에,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그리고 덜컥 할머니가 된 세상에도. 그러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세상에는 적응하기가 쉽지않았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움직이는 게 산을 옮기는 것만큼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놓고 싶지않은 것들이 있었다.- P31
왜 나의 필요를 채워주려 할머니는 희생하지 않았을까. 궁극적으로 현진이 궁금해진 부분은 그것이었다. 할머니는 마땅히 그런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기 위해 지금껏 부지한 목숨이라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그런 존재. 현진은 억지를 써가며 영실을 열렬히 원망해보았다.- P35
지금 은화에게 필요한건 그런 열기일지 몰랐다.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 P64
문득 제 몸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마신 상한우유가 그 조그만 벌레들이 제 몸 어딘가를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려버린 건 아닐까 하고요. 황당한 생각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하지만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까 멈출 수가 없었어요.- P75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므로. 작고 파란 불씨 하나가 그녀의 정원 안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