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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위의 사색자

물론, 폭설로 홍설이 진 후 도시는 더 이상 도시라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도로에서 차는 사라졌고, 수도관은 얼어 버렸으며, 전기와 통신은 걸핏하면 두절되기 일쑤였다. 신경이 마비된 도시는 유능한 기능들을 하나씩 잃거나 빼앗겼다. 도시는 한때 재밌게 잘 갖고 놀다가 시시해졌다며 미련 없이 내다 버린 거대한 완구와 다를 바 없었다.- P9
그 해골은 죽은 후에도 남는 것이니, 사람이란 결국 해골로 태어나 해골이랑 살다 해골을 간직하며 죽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삶이라는 얇고 불안한 표피를 덧입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P11
그는 회색인이 남기고 간 거라면 발자국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경고했다. 발자국을 따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회색인무리에 섞여 들 수 있어서였다. 내가 그런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하마터면,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하마터면,
내가 그를 잃을 뻔했던 것이다.- P12
문득 겉보기와 달리 아주머니의 속은 텅 비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료시카처럼 몸 속에 뭔가를 겹겹이 포개 놓음으로써 용케 해골을 잘 감춰 왔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마트료시카를 일렬로 펼쳐 놓은 듯 뚝뚝 끊어지면서 점점이 작아지고 있었다.- P52
"아주 오래된 연인들한테는 서로에게 나눠 줄 이야기 같은게 더는 없을 테니까요. 없어서 다른 걸 찾아야만 살 수 있을것 같으니까 떠난 걸 거예요."- P58
우리에게 남은적(敵)은 공포나 절망이 아닌 시간이었다. 탕진해선 안 되는.
예전부터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해 왔다. 사랑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그 두 가지는 상대방에게 가장 진실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어둠에는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 나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한낮인데도 전기가 나간 컨테이너 박스 안은 깊은 밤보다 더 어두웠다.- P61
"오늘이 끝이라 해도 우리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란게 특별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평소에도 얼마든지 할 수있었던 건데 용기가 부족해서 못하거나 망설이고 게을러서 놓쳤던 것들이지 싶어요. 기껏해봐야. 그러니까 끝이란게 우리한테 특별한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저 평범한 날의 어떤 날과 같거나 비슷한 날의 하루뿐일지도요."- P63
그가 천천히 식사 중인 반을, 나를 반하게 만들었던 애처로운 눈으로 계속 쳐다봤다. 저 시선때문에 나는 늘 반을 부러워했다.- P67
영원불멸할 것 같던 도시의 도도한 아우라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나는 블라인드 사이로 훔쳐보듯 색과 빛을 잃고 초라함으로 주저앉은 도시를 내다봤다. 세상에 단 1초도 같은장소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게 있다면 하늘, 바람, 바다,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P85
"그럼 도대체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유인하고 함정에 빠뜨려서 어쩌려는 거죠?"
그가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걸 누가 알겠어요. 피라미드 꼭대기를 꿰차고 있는 놈들만 알겠죠."- P111
순간 심장이 꽁꽁 얼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고약한 날씨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남자의 눈빛 때문에. 그것은 아주아득하면서도 묘하게 퍼져 나가는 기운이었는데, 그 경건한 눈 속에 숨쉬고 있는 건 ‘사람‘이었다. 내가 의대 공부며 병원냄새로 조금씩 잃어 갔던 인간의 것. 나와 세상이 가져 본 적 없거나 가졌지만 부족하게 가진 걸 그 개의 주인은 제대로 갖고 있었고, 써야 할 곳에 쓰고 있었다. 내가 반한 것이다.- P126
양초 때문인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이끌어 낸 것도 그의 말을 들어 주는 것도. 양초의 작고여린 불빛이 지닌 힘이랄까.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해 뭔가를 고백하게 만드는 것. 양초가 다 타 버리면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한 조각의 시간. 어쩌면 나는 예전부터 알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때 그의 사랑을 받던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와 어떻게 다르고 비슷한 점 같은 건 없었는지.(중략) 아무리 객관적으로 형편없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시절 사랑했던 여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환상과 신비감을 뿜어낸다.- P149
그때 그는 깨달았다. 결국 두사람을 애초부터 같은 극이었으나 아닌 척 만나 온 거라고. 닮은 사람은 서로를밀어낼 수밖에 없다고. 비슷한 결핍을 가진 연인은 서로의 빈곳을 채워 줄 수가 없는 거라고. 더 이상 나눠 가질 이야기가없어서 풍요로워질 수도 없는 거라고. 말을 끝마친 그가 아까보다 가늘어진 양초 불빛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때의 연애는 ‘작가의 말‘을 읽지 않고 덮어 버린 소설책같았어요."- P151
인생이 한 권의 소설이라면 우리의 페이지는 작가의 말을 읽는 중일까, 아니면 쓰는 중일까. 작가의 말이 없는 소설은 작가의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독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가짜로 지어낸 소설의 첫 페이지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해 낸 작가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이라는 진짜 속생각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 가는 거라고. 소설과 작가의 한 시절과 창작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끝 페이지.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우리의 페이지는 가장 솔직해야 하는 순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쪽짜리 작가의 말은 300쪽짜리 소설보다 쓰기 어려운 글일지도 모른다.- P151
나는 회색시의 우중충한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겠다는듯한 여학생의 외계적인 당돌함이 맘에 들었다. 회색눈도 회색 행렬도 무덤처럼 쌓인 죽음도, 어제 같은 오늘도 오늘 같을 내일도 여학생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P165
여학생은 신속하게 문을 닫고 가 버렸다. 말 많은 여학생이 돌아가자 컨테이너 박스 안은 정적이 나른하게 감돌았다. 허전해진 느낌이었다. 몇 날 며칠을 집에 머물던 사람이 예고도없이 떠나 버렸을 때의 허무와 허허로움 같은, 그것은 떠난 자보다 남겨진 자가 크게 느끼게 되는 부재의 병폐였다.- P166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지금의 평화로움이 소설 속 삽화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 삽입되어 영원히 재생 가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노래의 후렴구처럼 끝없이 반복됐으면 하고.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피도멈추지 않고 나왔다. ‘좋겠다는 생각‘이란 ‘후회‘처럼 결국은 모두 쓸데없고 소용없는 짓이었다.- P176
순간 나는 그가 웃음의 도움을 빌려 울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웃음이 깊어지면 눈물이 나기도 하는 몸의 반응을 이용해 실컷 울고 있는 건가,
하고, 평소 그는, 사내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가 신념을 지키면서 울도록 놔 두었다.- P181
허무하디 허무한 게 삶이라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살고 버텨야 한다. 딱 한 번뿐인 게 그거니까. 아니, 허무하지 않다. 누군가를 애달프도록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눈을 감는다면 어찌 허무하달수 있을까. 짊어지고 갈 수 없는 물질은 무상(無常)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붙들고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P190
사시사철 당당하고 도도하던 도시가 결국 암흑 앞에 무릎 꿇고 만 것이었다. 시민의 안녕을 위해 세워 둔 가로등은 ‘안녕‘ 못하는 키다리 고철 덩어리로 전락한 지 오래였고, 고층 빌딩은 한순간에 무너지거나 찌그러질 수 있는 구멍 송송 뚫린 거대한 종이 상자나 다름없었다. 아파트들은 분양이나 임대를 몇 달 앞둔 새 아파트처럼 황량하기만 했고, 상가 간판은 불을 켜지 않은 것으로 영업중단을 알려 왔다. 밤의 회색시에서 불빛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체와 다름없었다. 하늘의 장막인 구름과 땅의 양탄자인 눈이 모두 까만색에 가까워서 밤의 회색시는 거대한 어둠 덤어리였다. 그래서 밤은 밤보다 더 어두웠다.- P194
나는 그림자가 멍청해서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저녁이 되어도 그림자는 낮에 봤던 모양과 길이, 명암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바닥과 벽에 멍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작아지지도 그렇다고 커지거나 늘어나지도 않는 그것에서, 변하지 않고 소리도나지 않는 그것에서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계속 쳐다봤다. 말없이 말이 없는 서로의 그림자만을. 어쩌면 우리 또한 잠깐이라도 좋으니 아무 생각 없는 그림자처럼 모자라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P196
우리의 연애는 핑크빛이 아닌 회색빛으로만 기억되지만 나쁘지 않은 데이트 코스였고, 우리가 가졌던 대부분의 추억은 네모 길쭉한 박스 안에 모두 담겨 봉인되어 있었다. 부식되지 않는 타임캡슐처럼. 기한을 압축해 넣어 둔 통조림처럼. 이대로 시간이 닫힌 채 보존된다면 우리는 천년이 지나 발견될 수 있을까. 우리의 존재가 천 년 후에도 증명될 수 있을까. 만약 발굴된다면 우리에겐 어떤 상상과 이야기가 붙여질까.- P198
반도 그런 그의 눈동자를 한쪽씩 번갈아 쳐다보며 그의 말을 경청하려고 애썼다. 마치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방음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시도하는 연인 같았다.- P199
그게 온다고 한다.
그게 오든 말든 나는 반과 함께 1분이라도 좋으니 고통과 걱정 없는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며. 끝없이 거듭되는 악몽이어도 상관없으니. 꿈이란 눈만 뜨면 끝나는 것이니.- P234
동물이 아리기만한 건 사람과 달리 상처를 줘도 모진 말을 할 줄 몰라서다.
"미안해할 일이 있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왜요?"
"그런 게 있어야 애틋해지잖아요. 하나도 없다면 생각나도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예요. 더 이상 빚진 게 없으니까요."- P244
그게 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고전‘이 되는 걸까. 그게 오면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신데렐라처럼 재투성이에 누더기가 될까. 그래도 신데렐라에게는 유리 구두 한 짝이 있지 않은가.-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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