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커브를 반복하며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귀가 먹먹해져 점점 하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할머니의 집은 우주와 가깝다.- P6
③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무슨 뜻이야?"
"다음 여름에 또 우리가 무사히 만날 수 있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아남아 내년 여름에 건강하게 만나자고 약속하자."
"알았어."- P39
눈을 감고 유우를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암흑뿐 아니라 별같은 빛도 보였다.
새로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걸까. 이제 감은 눈 너머로 유우의 고향 포하피핀포보피아별이 있는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언젠가 우주선을 찾으면 나도 포하피핀포보피아별에 데려가 달라고 해야지. 우리는 부부니까, 내가 유우의 고향 별로 시집가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퓨트도 데려갈 것이다.
눈을 감고 우주를 떠다니고 있으니 정말 포하피핀포보피아별의 우주선이 바로 옆에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랑과 마법 안에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한 나는 안전했다. 아무도 나와 유우의 행복을 깨뜨릴 수 없었다.- P42
나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에 살고 있다.
동네에는 인간의 둥지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데루요시 삼촌이 이야기해준 누에님 방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줄줄이 늘어선 네모난 둥지 안에 짝을 지은 인간 수컷과 암컷, 그들의 자식이 산다. 암수는 둥지에서 자식을 키운다. 나는 그 둥지 중 하나에 산다.
이곳은 육체로 이어진 ‘인간 공장‘이다. 나 같은 아이들은 언젠가 이 공장 밖으로 출하된다.
출하된 인간은 암컷이든 수컷이든, 일단 먹이를 제 둥지로 나르는 훈련을 받는다. 세상의 도구가 되어 다른 인간에게 화폐를 받고, 그것으로 먹이를 산다.
- P44
시간이 흐르면 그 젊은 인간들도 짝을 짓고 둥지에 틀어박혀 번식을 한다.
5학년에 막 올라와 성교육을 받았을 때 ‘역시 그랬구나‘ 하고생각했다.
내 자궁은 이 공장의 부품이며, 마찬가지로 부품인 누군가의 정소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할 것이다. 암컷과 수컷은 공장의부품을 몸 안에 감춘 채 너나 할 것 없이 둥지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유우와 결혼했지만 유우는 외계인이니 아마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주선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분명 다른 누군가와 짝짓기를 해 세상을 위해 인간을 낳아야 하리라.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우주선을 찾을 수 있기를.
퓨트는 책상 서랍 안에 만들어둔 침대에서 자고 있다. 나는 퓨트가 준 요술봉과 콤팩트로 몰래 마법을 쓴다. 마법을 통해 내 생명을 미래로 운반한다.- P45
이곳은 둥지의 나열이자 인간을 만드는 공장이다. 나는 이곳에서 두 가지 의미로 도구이다.
하나, 열심히 공부해 공장의 노동 수단이 되어야 하는 도구.
또 하나, 열심히 여자가 되어 이 마을을 위한 생식기가 되어야 하는 도구.
나는 아마 어느 쪽으로도 꼴등일 것이다.- P50
어른도 고생이 많다. 어른은 아이를 심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른도 심판받고 있다. 시노즈카 선생님은 사회의 톱니바퀴로 성실히 일하지만, 사회를 위한 생식기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키우고 지배하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도구로서 심판받고 있다. 하지만 내 손으로 벌어 스스로 밥을 사 먹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P55
마법, 마법, 마법을 써야 한다. 암흑 마법이든 바람 마법이든뭐든 좋으니 마법을 써야 한다. 내 마음이 뭔가를 느끼기 전에 온몸에 마법을 걸어야 한다.- P62
살아남기 위해 마법을 써야 한다. 온몸을 텅 비우고 복종해야 한다.- P66
"아이의 목숨은 아이 것이 아냐. 어른 손에 달렸지. 엄마가 아이를 버리면 아이는 밥도 굶게 되고, 어른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아이는 모두 그래."
유우가 화단에 핀 꽃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른이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남아야 해."- P86
태어난 이후로 줄곧 이곳에 오고 싶었다. 아키시나도 그 하얀마을도, 우주선도 아닌 그보다 훨씬 먼 곳에 도달한 것이다.
아픔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우리의 내장은 물소리를 내며 한데 뒤섞여 있었다. 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조용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P103
세상에 순종적인 어른들이 세상에 순종적이지 않게 된 우리를 보고 동요하고 있었다.
어른들 역시 마취되어 있다. 마취되기 전의 기억이 없는 것처럼.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떠는 어른들이 내 눈에는 어떤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P110
모두 공장을 믿으며, 공장에 세뇌되어 공장을 따르고 있다.
온몸의 장기를 공장을 위해 쓰며, 공장을 위해 노동한다.
남편과 나는 ‘완벽한 세뇌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공장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끝없이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P126
"사실 인간은 일하는 것도, 섹스 하는 것도 싫어해. 최면술에걸려서 그게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지." - P127
남편의 부모, 형 부부, 친구들이 가끔 우리 공장을 정찰하러왔다. 나의 자궁과 남편의 정소는 공장에 조용히 감시당하고있다. 새 생명을 제조하지 않는 인간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은근한 압력을 받게 된다. 새 인간을 ‘제조‘하지 않는부부는 노동을 함으로써 공장에 공헌하는 모습을 어필해야만했다.
나와 남편은 공장 구석에서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다.
어느샌가 나는 서른네 살이 됐고, 유우와 보낸 그날 밤부터 스물세 해가 지나 있었다. 그토록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아직공장 구석에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고 있었다.- P127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 단 한 번이라도 공장에서 자유로워진다음에 죽고 싶어."
말리려 했지만, 남편을 이 세상에 붙잡아둘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좋아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런데도 남편이나 나나 살아남고 있었다.
무얼 위해 살아남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잘 모르겠다.- P128
내가 인간 공장의 도구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기 때문에 지구성인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젊은여자는 반드시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해야 하며, 그러지 않는 사람은 ‘외롭고‘ ‘재미없으며‘ ‘나중에 후회하는‘ 청춘을 보낸다는 낙인이 찍힌다.
‘되찾아야 해."
미호는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원하지도 않는 걸 왜 되찾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 공장으로 출하되는 우리는 출하를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먼저 출하 준비가 된 이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사람을 ‘지도‘
한다. 나는 미호에게 ‘지도‘받은 것이다.- P203
세상은 사랑을 하는 시스템에 지배되고 있다.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사랑에 가까운 행위를 하라고 강요받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먼저인지 사랑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지구성인이 번식을위해 이 시스템을 만들어냈으리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P204
공장은 연애가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간을 생산하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점점 더 힘주어 선전하는 것 같았다.
이 거대한 인간 공장을 위한 자궁은 내 아랫배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 장기를 공장을 위해 쓰겠다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규탄받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다.- P204
시어머니의 자궁도, 시아버지의 정소도 모두 도구다. 고작 유전자 따위에 지배당하는 주제에 뭐가 저렇게 자랑스러울까. 자긍심까지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성인은 참으로 가엾고사랑스러운 생물이다. 왠지 우스워졌다.- P223
"여기는 공장이니까. 우리는 아마 유전자의 노예일 거야."- P227
"정말 무서운 건 세상이 말하게 하는 말을 자기 말이라고 믿는 거야. 당신은 달라. 그러니까 당신은 분명히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야."- P234
"이 별에 와서 당신과 결혼하길 잘했어."- P236
"모르겠습니다. 자유를 받았지만 자유가 불편합니다. 명령과달리 이정표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지금, 아니, 분명 오래전부터 그걸 갖고 있던 거군요."- P246
"여기 오고부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지구성인 같은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 아닐까. 처음에는 다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었는데 우리 세 마리만 세뇌에서 풀려난 거지. 지구성인 같은 건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 이 낯선 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고"- P284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오른쪽 귓속에 내려앉아 서서히 고막을 흔들었다.
이날,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 됐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방 안의 촛불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가루가 우주에서 휘날려 떨어졌다.
누에나방의 비늘 가루가 떠올랐다. 방에서 무수한 나방이 날아올라 하얀 가루를 흩뿌리며 멀리 날아가는 광경을 상상했다.
새까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지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눈은 외부 생물의 기척을 뒤덮었고, 촛불 일렁이는 방에는 우리의 식사 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P286
"괜찮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당신 안에도 분명 이 모습의 당신이 잠들어 있으니까요. 분명 금방 전염될 겁니다."
안심시키려는 듯 유우가 지구성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우리는 내일 더 늘어날 겁니다. 모레에는 그보다 훨씬 더 늘어날 거고요."- P290
"밖으로 나갈까. 우리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
유우의 말에 나도,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마리의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은 조용히 팔다리를 덩굴처럼 이으며 일어났다. ‘밝은 시간‘의 빛과 흰 눈에 반사된빛이 외부 세계에서 우리의 우주선으로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는 지구성인이 사는 별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빛에 휩싸인 우리에게 호응하듯, 지구성인들의 울음소리가 별의 아득한 곳까지 메아리치더니 숲을뒤흔들며 퍼져나갔다.- P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