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P53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적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P61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 P83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P84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P86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01
"힘들지 않았어?"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시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P104
전화가 끊겼다.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P119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물론이전에도 색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돼 나오는 것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결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었다.
나는 어두웠다.라고 그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다웠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잠잠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그는 영원히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견디기에만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P122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같은 이 점을 나눠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 P142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P142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P143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P146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P175
고개를 외틀어 그녀를 외면하며, 영혜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찌르는 거지- P190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P192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P197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P200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P201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 P202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P204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 P205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P214
넋이 풀린 그들의 간절한 시선은 마치 창 너머로 걸어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렇듯이. 영혜가 그랬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P216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P218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P220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