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탑 위의 사색자

이제는 열 배로 갚으려고 해도 갚을 길이 없다.
기요는 꼭 아버지나 형이 집에 없을 때만 나에게 뭔가를 주었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 눈을 속여가며 나만 덕을 보는 일이다.
기요는 가끔 부엌에서 아무도 없을 때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 하며 나를 칭찬해주곤 했다. 
돌아가는 길에 산미치광이가 번화가에서 빙수를 한 그릇 사주었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는 꽤나 으스대고 무례한 작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러모로 도와주는 것을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나와 마찬가지로 성급하고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인 모양이다.
나중에 들으니 이 사람이 학생들에게 가장 인망이 있는 선생이라고한다.- P38
다만 지혜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 난처할 뿐이다. 난처하다고 굴복할 수는 없다. 정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정직한 것이 이기지 못하고 달리 이기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라. 오늘 밤 안에 이기지 못하면 내일 이기면 된다. 내일 이기지 못하면 모레 이기면 된다. 모레도 이기지 못하면 하숙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오게 해서 이길 때까지 이곳에서 버틸 것이다.- P60
대체로 낚시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정한 인간들뿐이다. 비정하지 않다면 살생을 하며 즐거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고기든 새든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즐거울 게 뻔하다. 낚시나 사냥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면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 어려움 없이 살면서 생명을죽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니 정말 분에 넘치는 소리다. - P64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요를 생각했다. 돈이 있어 기요를 데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놀러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알랑쇠 같은 인간과 함께오면 재미없다. 기요는 쭈글쭈글한 할멈이지만 어디를 데려가든 부끄렵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알랑쇠 같은 인간은 마차를 타든 배를 타든 료운카쿠에 오르든 도무지 가까이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교감이고 빨간셔츠가 나라면 역시 나에게 알랑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빨간 셔츠를 조롱했을 것이다.- P71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나빠지는 일을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둥 애송이라는 등트집을 잡아 경멸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 등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빨간 셔츠가 호호호호 하고 웃은 것은 나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단순함이나 진솔함이 비웃음을 사는세상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기요는 이럴 때 절대 웃는 법이 없다.
무척 감동하며 들어준다. 기요가 빨간 셔츠보다 훨씬 훌륭하다.- P76
비록 빙수든 감로차든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를 어엿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후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몫을내면 그뿐인 것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보답이다. 아무런 지위가 없다 해도 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립된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백만 냥보다 소중한 감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P80
세상은 온통 사기꾼들뿐으로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싫어졌다.
세상이 이런 곳이라면 나도 지지 않고 남들처럼 속이지 않으면 살아나갈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소매치기한 돈까지 가로채야 세 끼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다고 팔팔하게 건강한 몸으로 목을 맨다면 조상님 볼 면목이 없는 데다 소문이라도 나면 난처하다. 생각해보니 물리학교 같은 데를 들어가 수학 같은 쓸모없는 재주를 배우기보다 그 6백 엔을 밑천으로 우유보급소라도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기요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나도 먼 데서 할멈 걱정을 하지 않고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있을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시골로 와서 보니 기요는 역시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씨 좋은 여자는일본 전역을 돌아다녀도 좀처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P98
그 후로 나는 빨간 셔츠가 수상한 놈이라는결론을 내렸다. 수상한 놈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사람은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대나무처럼 곧지 않으면 미덥지 못하다. 올곧은 사람과는 싸움을 해도 기분이 좋다. - P113
빨간셔츠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고 고상하며 호박 파이프를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사람은 방심할 수도 없고, 좀처럼 싸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해도 에코인의 스모‘와 같은 기분 좋은 싸움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1전 5리를 받네 안 받네 하며 교무실 전체를 놀라게 한 실랑이의 상대인 산미치광이 쪽이 훨씬 인간답다.- P114
언변이 좋은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할 수 없다. 끽소리 못하는 사람이 꼭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표면적으로는 빨간 셔츠의 말이 아주 타당하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마음속까지 끌리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사나 대학교수가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사야 한다. 중학교 교감 정도의 논법에 어떻게 내마음이 움직인단 말인가.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이다.- P125
그런데 실제로는 큰 착각이었다. 하숙집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정말 착각 대장이다. 학생들이 용서를 빈것은 진심으로 뉘우쳐서가 아니었다. 단지 교장의 명령을 받고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였을 뿐이다. 머리만 조아리고 교활한 짓을 계속하는장사꾼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용서는 빌지만 결코 장난을 그만두지않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라고 할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도 가짜로 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가짜로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 만약 정말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144
하지만 가엾게도 기요는올 2월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죽기 전날, 기요는 나를 불러 말했다.
"도련님, 제가 죽거든 제발 도련님네 묘가 있는 절에 묻어주세요무덤 속에서 도련님이 오시는 걸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래서 기요는 지금 고비나타의 요겐지라는 절에 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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