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창문 커튼에서, 교문에서, 복도 바닥에서, 칠판 너머에서... 실은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작은 비밀들을 살포시 드러내고 아이들을 그 세계로 불러들이는 이야기에 조용히 경탄하고 전율했다. 특히 '칠판 너머에서'는 압권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점이 있다. 바로 '시점'의 혼란이다. 거의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우리 학교'라는 표현의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첫 번째 이야기 '커튼 뒤편'의 첫 문장에서부터 '우리 학교'가 등장한다. 이야기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채린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1인칭 시점 중에서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 화자가 채린이와 아이들을 지켜보는 시점인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틀림없는, '우리' 중 하나인 화자가 관찰 대상의 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 이야기들도 그렇다. 3인칭 관찰자 시점 또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되다가 갑자기 '우리 학교'가 등장하는 순간 이 학교에 다니는 누군가의 존재가 끼어들어 그간 따라온 시점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점은 전지적 시점이며 이는 특정한 인물이 아닌,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신' 또는 '카메라'의 시점이다. 독자는 전지적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며 서술하는 특정 '서술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간간이 등장하는 '우리 학교'라는 표현에서 이 학교에 다니는 익명의 누군가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 인물이 관찰 대상자의 심리까지 들여다보는 기이한 시점을 독자에게 따라가게 한다.
그런 데다 또 하나의 시점이 끼어들어 혼란을 더한다. 바로 '작가 시점'이다. 고전 소설에 자주 등장한, 현대 소설에서는 지양해야 하는 시점. 상황과 사건과 행동과 심리의 서술 이외의 다른 목소리. 이야기를 계획하고 통제하는 주체인 작가의 목소리가 불쑥불쑥 끼어들고 있다.
-이제 교문이 열렸으니 학교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뭐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 ('뭐' 때문이 아님)
-지팡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모르지.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 외에도 무척 많다. 작가 시점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 시점을 유지한다면. 즉 이야기를 들려주는 누군가를 대놓고 상정한다면. 그런데 이 이야기들에는 무려 세 개의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제한적) 전지적 시점, 작가 시점 - 이 혼재돼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학교'라는 표현만 없었으면 전지적 + 작가 시점으로 무난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는...)
시점은 약속이다. 약속을 어긴 서술은 독자에게 혼란을 줄뿐더러 이야기 자체의 신뢰를 흔든다. 이 혼란을 꾹꾹 눌러담으면서까지 이 이야기의 놀라운 환상과 미덕에 감탄하긴 했지만 시점을 잘 지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