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아니, 그럴 수 있는 동물이다. 배신할 수 있는 동물. 자신의 배신이 온전히 약한 생명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있는 동물. (임보일기/최은영)- P9
떠나온 사람보다 떠나보낸 사람이 멀리 간 존재를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P93
오늘 새벽, 제이의 문자는 멀리 있는 내가 몹시 그립다고 했다. 정말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래서 거짓말 같았다.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으니 그립다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P94
마당 한 귀퉁이에 샛노란 수선화가 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노란빛이다. 봄은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다. P99
언제 올 거냐고, 남편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제 나를 놓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일상을 안온하게 유지시켜줄 누군가 필요한 것이므로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게 또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 제발 예민 좀 떨지 말라고 하겠지, 제발 꼬치꼬치 따지지 말라고 하겠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고 하겠지. 그 말이 나를 더욱 숨 막히게 한다는 걸 당신은 나와 10년 아니 20년을 살아도 모를 거라고, 그래서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같은 말의 반복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p100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삶은 그다지 무겁지도 슬프지도 불행하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얼마든지, 얼마든지. P105
(식초 한 병/김선영)-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