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책은 유명한 것 두세권 정도를 읽은 정도이지만 그녀의 필력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잘 쓰는 사람이 쓰는 여행기는 이렇게 다르구나 싶다. 여행 동안
만난 사람들과 경험은 유쾌하게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작가 본인의 과거나 작품과 관련된 깊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녹이고 있다. 많은 에세이들은 글쓴이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하고 그게 나에게 부담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여행기에서처럼 작가의 내면을 살짝 엿본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작가는 단순한 슬럼프가 아닌 엔진이 꺼져버린 상황에서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이 가고 싶어했던 곳, 안나푸르나를 떠올린다. 해외여행 경험도 없으면서 히말라야로 떠나는
용기와 실행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읽다 보니 왜 번아웃이 찾아왔는지 조금 알 것 같다. 환상종주를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여행기 초고를 끄적이는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고, 자신을 혹사하는 것이 익숙해보여 안쓰럽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 쏘롱라패스에서 작가는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닌데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진하고 에너지가 바닥난 사람들에게, 작가는 같이 힘내자느니 이런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바닥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치열한 기록을 읽으면서 세상에 다시 맞설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덧, 소설도 아닌데 이런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글이라니
다시금 작가의 공력을 느낀다.)
왜 가보지도 못한 곳을 소설 주인공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곳으로 설정했을까.
아직 읽지 못한 <내 심장을 쏴라>가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산악인과 셰르파들 사이에서 신화처럼 회자된다는 <럼두들 등반기>도 함께.
읽은 책에서 또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독서는 너무 즐겁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해왔다.
죽는 날까지.- P186
이제 와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이 두려움에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지 않으면 고꾸라진다는 두려움, 고꾸라지면 죽는다는 두려움으로부터.-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