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선명히
  • 언데드 다루는 법
  •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 13,050원 (10%720)
  • 2016-12-30
  • : 198

사랑하는 아내인 에바가 사고로 죽었다. 주인공 다비드는 병원으로 달려가 그녀의 시신을 확인하며 절망하는데, 별안간 죽었다던 그녀가 자신의 손을 다잡는다. 엘크에 받혀 뻥 뚫린 가슴을 일으키며, 아작난 자신의 몸이 무슨 문제냐는 듯 살아난다. 왜?

 그와 동시에 스톡홀름에서는 죽은 지 2달 미만의 시체들이 모조리 살아나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시작하고, 각 병원의 영안실은 아비규환이 되면서 동시에 유족이었던 사람들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한다. 살아난 시체는 자그마치 2천구다. 다시금 살아난 그들은 ‘부활자’라 칭해지고, 개발에 실패한 슬럼의 빈 건물에 격리된다.

 

 욘 아이비데 린스크비스크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렛 미 인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렛 미 인은 뱀파이어를 소재로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의 이야기를 했던 독특한 작품이다. 주인공부터가 왕따 소년과 영원의 굴레에 갇힌 열두 살 뱀파이어 소녀다. 친구를 원할 뿐인 소녀는 그래서 기존의 뱀파이어들과 많이 달랐다. 소녀는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는다. 사냥감의 몸을 쓸어 넘긴다든가, 입술을 가져다대며 희생양을 유혹한다든가 하는. 대신 좀 더 비참하다. 외롭다. 애처롭다. 살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빼앗아야하며 그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태양에게 경멸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세상에서도 끊임없이 도망쳐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 받지 못 한 장소에는 들어갈 수 없다’ 는 뱀파이어 전설을 차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독특한 시선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좀비가 나오는 소설이지만, ‘생존자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좀비들이 산 자의 살점을 게걸스레 뜯는 일도 없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설령 그들에게 물린들 전염 되지 않는다. 대신 작품에는 좀 더 다른 게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그이를 뜻밖의 모습으로 재회했을 때의 당혹감,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혐오감까지.

 린드크비스크는 좀비가 호전적으로 묘사되는 작품들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 의문을 시작으로 좀 더 다른 결의 이야기를 써보자고 다짐한 작가는, 어김없이 본질을 꿰뚫어본 것 같다. 이를테면 무덤에서 방금 기어 나온 시체의 썩은 살과, 그것이 그대로 짓이겨지는 무력함이나 나약함 같은 것들이다. 등장하는 좀비들은 기이할 정도로 비폭력적이면서 존재 만으로도 커다란 물음표다. 죽었다 살아난 이 시체는 내가 사랑했던 그 존재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이 존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언데드 다루는 법을 읽으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구스타브 가족의 이야기다. 중반에는 저널리스트인 말레르가 쓴 기사가 나오는데, 묘사된 바에 의하면 말레르의 기사는 철저한 르포타주 문체로 ‘부활자 사건’을 서술하지만 말미에는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견해를 넣어놨다고 했다.

 

“ … 그럼에도 우리는 자문해야만 한다.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하는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가족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사랑에 관한 이 문제를 정부 관계자들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

 

 말레르와 안나 부녀는 2개월 전 안타까운 사고로 여섯 살 난 손자이자 아들을 잃었다. 추락사였다. 아이를 지키지 못 했다는 죄책감과 충격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내내 지옥이었다. 그렇게 상실감과 고통에 찬 하루하루를 보내던 말레르에게 시체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취재를 통해 지옥도와 같은 영안실 풍경을 확인한 그는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향한다, 엘리아스의 무덤으로, 사랑하는 손자를 향해. 기어코 무덤을 파내고 관 뚜껑을 열어 재낀 말레르는 상해버린 손자의 시체를 보고 간신히 구역질을 참는다. 쪼그라든 이 아이는 엘리아스가 아니라며 눈물 짓지만, 그럼에도 결국 꿈틀거리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온다. 손자가 그대로 영안실에 끌려가는 꼴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저 기사 또한 말레르가 손자를 데리고 온 뒤 쓴 것이었다.

 

 그렇다. 사랑의 문제다. 정부는 그저 부활자들을 격리하고 검사하는 등 형식적인 대처를 하지만, 가족들에게 이 문제는 단순히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활자이기 이전에 가족이었던 이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을 맞이하고 인정해서, 그리하여 비로소 다시 한 번 보내줄 시간 까지도. 갑작스럽게 깨어난 그들은 사랑하는 이가 진정으로 이별을 마음먹었을 때야 비로소 눈을 다시 감는다. 망설이던 다비드는 결국 에바를 보내주고, 다비드의 이야기를 들은 안나는 아들인 엘리아스를 보내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이 기이한 ‘부활’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기회였던 셈이다.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었는데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었던 이들을 위한, 갑작스러웠던 만큼 상실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서로를 위한 기회. 그렇기에 재회를 약속하며 했던 이별은 더 이상 이별이 아니라 일종의 해방이었을 지도 모른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린드크비스크의 무시무시한 별명인 ‘장르 파괴자’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한 작품이다. 살육과 생존의 아비규환이 아닌, 좀 더 다른 분위기에서 사랑의 상실, 그 수용과 인간 군상을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강풀 작가의 작품인 ‘당신의 모든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두 이야기는 좀비의 탈을 쓰고 사랑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같다. (물론 당신의 모든 순간은 기존 좀비의 틀을 고스란히 사용하였다.)

 

 채널 예스에서 진행했던 작가 인터뷰 링크. 인터뷰어가 대담하게도 작가에게 ‘소포모어 징크스’에 대해서도 물어본다.

 

http://ch.yes24.com/Article/View/33314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