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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의 글 공간

 

 

어떤 책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도 그런 경우인데 언제부터인지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를 찾아가는 어느 여행기에서도, 작가들의 에세이에서도, 최근에 읽은 프루스트와 관련된 어느 책에서도 플로베르를 이야기했다. 어떤 작가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작가를 경험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은 좀 묘한 감상을 남겼다.

 

 

 

"그녀의 전 존재 속의 그 무슨 반동으로 인하여 그녀가 저리도 정신없이 생의 쾌락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p399)

 

 

 

읽는 내내 한편으론 짜증스러웠고, 한편으론 경탄했다. 작가의 완벽주의가 그 이유였는데 하나하나 갈고닦고 조인 듯한 문장은 그 자체로는 훌륭했지만 인물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왜 그런 감정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주어진 대본대로 현장에서 즉흥 연기를 하는 배우들 같았다. 엠마는 엠마의 역할을, 샤를르는 샤를르를.., 인물들이 소설 밖으로 나와 실존할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아니라 상자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그 캐릭터를 실감하려면 다시 책을 펼쳐들고 작가의 섬세한 비유와 설명에 집중해야 한다.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정해진 이야기 속에, 자신의 성정을 과장되게 연기하며 배치되어 있는 느낌이다.

 

 

 

플로베르는 어느 편지에서 '무(無)에 관한 책',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단다. 그의 뜻대로 이 책은 지탱하는 힘이 굉장했다.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향해 가면서도 적확한 비유들로 가득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환점마다 완벽한 무대장치를 해놓은 듯 느껴졌다. 샤를르와 엠마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절묘한 교차가, 주변 인물들의 완벽한 쓰임새가 정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성향으로선 이런 조감도를 말하게 되는 것 자체가 소설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비평가들의 즐거움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정과거, 부정과거, 현재분사, 특정 대명사, 특정 전치사 등을 완전히 새롭고 개인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는 칸트가 범주를 비롯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실재와 지식에 관한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

 

 

 

최근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란 책을 읽다가 플로베르의 문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여러 편의 모작을 발표했는데 유명한 작가의 글쓰기 특징을 모방해서 마치 그 작가가 쓴 것처럼 특정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글쓰기 연습은 자기만의 문체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프루스트는 플로베르를 모작하며 그 문체의 특징을 반복함으로써 대상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플로베르에 의해 프랑스어 문법이 재창조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뛰어나다는 플로베르의 문체를 원문 그대로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줘도 읽지를 못 하니) 아쉬웠다. 하지만 번역된 문장임에도 섬세한 세공품을 보는 것 같았는데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조망하는 느낌이 든다. 문장에 고요히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속의 창문들이, 평소엔 열린 적이 없던 것들도 하나씩 차례대로 열리며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쌓여 있던 먼지들이 날리며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을 되찾는 느낌이다. 늘 무언가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내겐 또 하나의 현미경을 쥐여주는 글보단 정체되어 있는 공기가 순환되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다. 플로베르의 직유보단 프루스트의 은유가 좋은 이유이다.

 

 

 

"반쯤 펼쳐진 채 오므라들 줄 모르는 그 손 자체가 그때까지 견디어온 무수한 고통을 겸허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수도자와도 같은 완고함으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 표정이 돋보였다. 두 눈은 웬만한 슬픔이나 감동으로는 결코 녹일 수 없는 푸른빛이었다. 오랫동안 가축들과 함께 어울려 지낸 나머지 그녀는 가축들처럼 말이 없고 덤덤해져 있었다. (...) 이리하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이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반세기에 걸친 이 노예 생활이 불려 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 (p219)

 

 

 

그럼에도 정말 뛰어나다 생각했던 부분은 로돌프와의 관계가 시작되는 '농사 공진회' 장면과 레옹과의 시작을 알리는 '대성당'의 묘사였다. 참사관의 연설과 그들의 대화가 교차하는 '농사 공진회' 장면은 엠마와 로돌프의 격정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주변 상황의 묘사를 통해 각 계층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오십사 년 간의 근속에 대한 포상으로, 은메달 한 개와 이십오 프랑을 받는 자그마한 노파는 그것으로도 더없이 행복해한다. 하지만 연설이 끝나자 각자는 제 위치로 복귀해 주인들은 하인들을 거칠게 다루고, 하인들은 가축들을 후려친다.

 

 

 

그런가 하면 설레는 마음으로 엠마를 기다리는 레옹에게 '대성당'은 신성함이 아닌 규방 같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그가 지금껏 음미해 본 일이 없는 온갖 우아함과 정조가 허물어지려 할 때의 매혹에 감싸인 채, 천장의 궁륭들은 그녀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성당지기는 그들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기는커녕 거창한 어조로 성당을 안내해주려 한다. 격정을 앞둔 레옹의 초조함과 눈치 없는 장광설의 교차는 대성당이라는 배경과 그들의 일탈이 만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급기야 성당 밖으로 뛰쳐나간 그들은 마차를 탄다.

 

 

 

"이따금 마부는 마부석에 앉아서 거리의 술집들 쪽으로 절망적인 시선을 던지곤 했다. 대체 무슨 미치광이 같은 격정에 사로잡혔기에 이 손님들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 채 내처 달리고만 싶어 하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 멈추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곧 등 뒤에서 어서 가라고 호령하는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p356)

 

 

 

김화영의 여행기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는 「마담 보바리」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을 찾아가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을 당시엔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기도,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나에겐 플로베르에 대한 궁금증을 안겨준 첫 시작이기도 했다. 플로베르가 묘사한 루앙 대성당은 모네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첨탑에 대한 묘사는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레옹에겐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찬사가 성가시기만 하다. 성당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가 엠마와 함께 탄 마차는 내처 달리기만 하는데, 오직 달리는 모습만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그 속도감과 격정이 느껴진다. 바로 그 마차 안의 사정이 궁금해진 제2제정의 검찰이 「마담 보바리」를 법정에 세웠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플로베르는 풍기문란죄로 기소를 당하지만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살롱을 출입하며 세력가들과 친분을 쌓아 두었던 덕에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같은 해에 「악의 꽃」을 발표한 보들레르는 똑같은 죄목으로 기소당하지만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을 선고받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사는 모습은 어느 시대건 다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엠마는 왜 그토록 자극적인 것들을 필요로 했을까. 멈추지 않고 달리는 마차처럼 그토록 격정적으로 달리고만 싶었을까..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 (p132)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런 아쉬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 (p410)

 

 

 

어쩌면 사랑에서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를 살던 여자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엠마가 연애편지를 쓰는 대신 소설을 썼더라면, 그림을 그렸더라면,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이곳에서 느끼지 못 하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 추구하느라 오히려 누릴 수 있는 행복마저도 고갈시키는 엠마에게, 남편 샤를르는 존재 자체로 굴욕감을 주었다. 길게 이어지던 엠마의 결혼 행렬은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라는 깨달음 이후로 더 큰 자극을 찾아 치닫다가 장례 행렬로 바뀌게 된다. 엠마가 다른 남자들과 행복의 밀어를 나누던 뜰 안의 벤치에선 남편 샤를르가 사랑의 슬픔에 숨이 막혀 죽는다. 샤를르는 소설에서 엠마의 모든 행위들을 부각시켜주는 다른 한쪽의 균형을 묵묵히 담당하다가 그렇게 조용히 퇴장한다.

 

 

 

소설에선 워낙 극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엠마와 같은 성정은 누구에게도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환상이나 이상을 채워줄 무언가를 추구하는 성향은 그 정도의 차이와 대상만이 다를 뿐, 사람들 대개는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어쩌면 엠마도 어떤 대상을 사랑했다기보단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정신을 격정적인 상태로 몰아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려면 어떤 자극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관심이 갔던 인물은 같은 선상에서 극과 극의 성정인 엠마나 샤를르가 아니라 약제사 '오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금사자 여관 앞에 있는 오메 씨의 약국이다! " (p109)

 

 

 

플로베르 역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마을 용빌을 묘사할 때 오메의 약국을 세세하게 그려 보인다. 오메는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유형의 인물로 이 소설에선 엠마 이상으로 분주하다. 묻지 않았는데도 설명하고, 끊임없이 참견하며, 유식한 체하기를 좋아하는 영악한 기회주의자다. 플로베르가 수집한 다양한 지식들은 모두 오메의 입을 빌려 나열되는데 그는 '루앙의 등불'이라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기도 한다. 물론 기자정신에 입각해서라기보단 자신에게 유리한 계산이 있어서이다. 인물들 중 가장 열심히 말하는 인물이라서 오메가 있는 곳에선 독자인 우리들도 가차 없이 그의 의견을 들어야만 한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커서 상대적으로 눈치는 없는 사람인데 오메는 알게 모르게 엠마의 일탈을 부추기기도 한다.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많은 요즘은 오메와 같은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알아야 할 정보들이 많아지다 보니 시선은 산만해지고, 듣는 귀는 작아지지만 상대적으로 각자의 입은 커져가는 느낌이다. 그나마도 소설 속 오메에겐 그 말들을 들어주는 이가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간다. 하지만 그저 그런 현실의 오메들은 그처럼 만족하기 어렵다. 더 많이 말하고, 더 크게 말해보아도 공허할 뿐이다. 때론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이 소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 자신의 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름답고 적확한 묘사와는 상관없이 무엇이든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젠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은 인물들, 문장들 때문일 듯도 싶다. 읽는 동안 카뮈의 글이 그리웠다. 정적 속에도 힘을 지니고 있는 그런 글들이, 한편으론 체호프의 서늘한 위안이 필요했고, 또는 어지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말함에도 간절함이 담겨 있던 파묵의 글이 내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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