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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의 글 공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마르셀 프루스트
  • 13,500원 (10%750)
  • 2012-09-05
  • : 7,946

 

 

소설을 읽다 보면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여 집중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되는 것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로 확실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통해 심상을 스케치하듯 묘사하는 작가에겐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그 목소리가 가장 선명했던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J. D. 샐린저였는데 이미지가 아닌 단어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작가의 글이 가장 쉽게 읽히는 것 같다. 귓가에 바로 속삭여주는 것 같은 캐릭터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심상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이런 소설을 떠올려보면 전체 스토리는 흐릿하더라도 특정한 성정을 지닌 인물이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또 다른 경우는 '그림'이나 '영상'처럼 경험하게 되는 작가인데 최근의 기억으론 오르한 파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 폭의 세밀화를 감상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촘촘히 촬영한 기록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내면의 목소리보단 시각적으로 집중시키는 묘사들에 충실해서 소설 전체의 내용을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하게 해준다. 그런데 듣는 것이나 보는 것, 어느 한 쪽으로도 집중시켜 주지 않아 난해했던 작가도 있다. 바로 프란츠 카프카인데 목소리로 치자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고, 보이는 시야마저도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듯 지극히 한정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감각을 통제당한 느낌 때문에 되려 더 집중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언제나 슬픈 마음으로 올라가는 이 가증스러운 계단에서는 바니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내가 매일 저녁마다 느끼는 그 특별한 슬픔을 흡수하고 고정해, 이런 후각적인 것에 대해 별 볼일 없는 내 지성보다는 내 감성에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p58)

 

 

 

"뭔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나더니, 다음에는 위쪽 창문에서 모래 알갱이를 뿌리듯 가볍고 넓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 소리가 퍼지고 고르게 되고 리듬을 타고 액체가 되고 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보편적인 음악이 되었다. 비였다. " (p182)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은 온 감각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매 문장이 온갖 감각으로 채색된 한 폭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단어로 그 뜻을 곧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그림을 그려 놓는 듯한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이미지들이 흩어지기 전에 나의 온 감각을 열고 그림 속 정경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프루스트를 쉽게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지겹거나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 집중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짧은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도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그림이 펼쳐지던 공간에서 나의 상념과 프루스트의 정경이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는 한다. 몇 페이지에 걸친 문장을 읽을 땐 시간을 거스른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억지로 읽으려 애쓸 필요도, 밀려드는 상념을 떠밀어 낼 필요도 없이 프루스트와 나를 동시에 개방하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가며, 음미해 가며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작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비본 냇가에 물병을 담그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물병은 냇물로 채워지면서도 냇물로 둘러싸여, 한편으로는 단단해진 물처럼 허리가 투명한 '그릇'인 동시에, 흐르는 액체 수정이라는 큰 그릇에 잠긴 '내용물'이기도 해서, 물병 형태 그대로 식탁에 나왔을 때보다 더 감미롭고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청량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청량감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단단하지 않은 물과, 혀로는 음미할 수 없는 액체성 없는 유리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분배되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 (p29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엔 익히 잘 알려진 문장들이 등장한다. 아름답기만 한 문장이 아니라 소설 속 화자의 심상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이 묘사하는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위의 이 문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해 잃어버린 기억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듯, 내가 기억하는 나의 시간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의 빛과 냄새, 소리, 공기의 무게감들이 떠올랐고, 슬픔의 시간들 마저도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다.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담고 있던 물병이 프루스트의 물결을 만나 투명한 수정처럼 개방되어 청량감 있게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영감으로 의식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1권의 역할은 긴 여정을 위한 의식의 개방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의 독창적인 착상은 정신으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같은 양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 정신이 동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했다는 데 있다. " (p154)

 

 

 

이 소설은 지극히 관념적인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이다. 생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일깨워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 같다. 감각들의 묘사는 마치 마법처럼 아름답고 관념적인 묘사들은 더없이 예리하다. 처음엔 너무 많은 감각들이 동시에 밀려와 저항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그냥 같이 흘러가기로 마음먹으니 편안히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내면을 향한 단단한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는 시선을 약간 돌려보면 늘 나를 볼 수 있었다. 오직 타인을 향한 눈금자를 지니고 있는 듯이 나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고, 우리가 좋아하는 화가에게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볼 때, 또는 지금까지 연필로 스케치한 데생만을 보다가 완성된 그림 앞에 설 때, 또는 피아노 곡만을 듣다가 나중에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입혀서 들었을 때와 같은 기쁨을 주시면서, 손가락으로 탕송빌의 울타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넌 산사 꽃을 좋아하지 않느냐. 이 분홍색 산사 꽃을 좀 보려무나. 정말 예쁘지 않으냐. " " (p245)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싶다. 발견할 수 있는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좋은 소설은 이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정신을 다룬 여정은 나의 정신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실제 삶을 이해하는 덴 많은 시간이 걸리며, 평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삶을 바라보다 보면 나의 삶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인 단어와 이미지, 감각들로 말이다. 나를 풍요롭게 해주는 건 나의 시간들이기에 우선 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자신의 불편한 고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권은 더없이 좋았고, 위의 인용문처럼 새로운 기쁨이었다. 문장마다 멈추어 감상을 쓰고 싶을 만큼 많은 영감들이 깨어났다. 무엇보다도 경험해봐야 할 소설이었다. 때론 한 권의 소설이 보다 더 많은 걸 압축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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