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니?”
“기억나요?”
아직 빛보다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 있는 새벽. 아이와 엄마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잠들지 않은 두 사람은 함께 지나온 시간의 기억을 되돌아봅니다. 싱그러운 풀빛 내음 가득한 들판에서 세 식구가 함께 즐겼던 나들이,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다 건초 더미 위에 꽈당 넘어졌었던 생일날, 한밤에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환히 웃을 수 있었던 한밤의 냄새, 그리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기까지의 과정까지… 추억들을 하나씩 번갈아 꺼내어 함께 나누는 동안, 새벽의 어둠은 아침의 빛으로 조금씩 나아갑니다. 머리를 맞대고 누운 아이와 엄마의 얼굴도 조금씩 선명하게 보입니다.
오늘의 여명은 어제의 그것과 다를 바 없지만, 두 사람이 맞이할 오늘의 일상은 어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집안 가득 들어찬 아침의 빛을 마주할 때, 이야기 밖에 선 독자는 바로 발견하게 됩니다. 가족의 구성과 배경 모두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요. 그러나 지나간 시간의 기억으로 뒤돌아서고만 싶은 마음은 이야기 안에서 쉽게 발견하지 못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회상’이 반복되는 구조의 그림책, ⟪기억나요?⟫는 시드니 스미스 작가의 개인적인 서사가 담긴 작품입니다. 여전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로부터 파생된 어떤 믿음은 여전하게 떠오를 아침 해처럼 아이를 비추고 지키고 있는데요. 마치 아이는, 다가올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모든 게 바뀌어버린 지금의 전부이지 않음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독자가 하나씩 알아차려 갈 크고 작은 변화는, 작가가 직접 경험하며 확신한 믿음의 증거처럼 보입니다.
⟪기억나요?⟫를 비롯한 시드니 스미스 작가의 최근작(⟪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할머니의 뜰에서⟫)은 이전의 작품들( ⟪괜찮을 거야⟫, ⟪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등)과는 다르게 인물과 배경 등에 검정의 윤곽선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어떤 존재가 선명히 분별 되지 않는다 해도, 그 존재를 알아주고 안아주는 ’빛‘과 같은 마음과 믿음 앞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는지… 작품들 속에 담아냈을 작가의 마음을 감히 가늠해 봅니다. 그러곤 다시, 천천히, ⟪기억나요?⟫를 손끝으로 감상해 봅니다. 함께 한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시간’을 향한 믿음으로 아이의 오늘과 내일을 환히 비추고 지켜줄 ‘빛’을 감각해 봅니다.
오로지 두 사람만 있는 새집. 아이와 엄마는 서로의 곁에 오롯이 누워 있습니다. 가족의 구성과 배경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두 사람이 지키고 채워 갈 가족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깥의 창문 너머로, 낯선 도시 위로, 집 안으로 떠오르는 오늘의 빛 안에서 아이는 내일의 빛을 확신합니다. 여명(黎明)의 또 다른 뜻은 ‘희망의 빛’입니다.
🔖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어요. 우린 잘 지낼 줄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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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요?⟫ 에서 아이의 말은 연한 파랑, 엄마의 말은 연한 빨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어떤 문장이 누구의 말인지 독자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정한 작가의 의도적인 배려일 테지요. 그런데 저는 어쩐지 아이의 ’마지막 말‘이 이전과는 다른, 이전보다 좀 더 ’짙어진’ 파랑으로 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생각이 그저 근거 없는 느낌뿐이라 해도 (즉, 실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의 모든 말이 똑같은 색으로 인쇄되었다 해도), 저는 아이의 마지막 말을 좀 더 짙어진 파랑의 마음으로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 '책읽는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