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과 이후를 구분 지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
내게서 사라진 어떤 부재를 오롯이 통과하는 자리.
어떤 상상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자리.
세대와 세대 사이 기억의 끈을 이어주는 자리.
온전한 쉼의 자리이자 충만한 기쁨의 자리.
슬픔을 마음껏 토로하는 자리이자 아픔을 나란히 나눠지는 자리.
계절의 변화를 유유히 느끼며 순간의 무언가를 담아가는 자리.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고서 순간의 무언가에 몰두하는 자리.
무한한 바다를 바라보며 삶에 대한 질문을 무한히 품어가는 자리.
만남과 이별이 켜켜이 쌓여가는 삶의 후경이 되어주는 자리.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함께 할 수 있는 자리.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순간의 책갈피가 되어주는 자리.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가름끈이 되어주는 자리.
저마다의 서사 안에서 단순한 ‘공간’이 아닌 고유한 ‘장소’가 되는 자리, ‘그네’. 16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두께 안에 담긴 것은 편안한 색채로 구현된 삶의 모든 찰나. 그네의 옆과 위, 앞과 뒤에서 그리고 찍어낸 장면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본다. 활기차서, 외로워서, 흐뭇해서, 처연해서, 그리워서, 고마워서 아름다운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름답지 않은 순간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을 만난다.
원서의 제목은 단순히 ‘그네(Die Schaukel)’이지만, 김서정 선생님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이 책에는 ‘삶이 머무는 자리’라는 수식어를 품은 제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쏙 들어간 제목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머무른다’는 표현이 머무를 수 있는 아무 곳을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는 그네, 누군가에게는 산꼭대기의 표지석, 누군가에게는 집 앞 놀이터의 의자, 누군가에게는 강변의 트랙, 누군가에게는 집 근처 카페의 구석진 의자… 어느 마음과 어느 모습으로 머물러도 괜찮은 곳. 혼자여도 함께여도 괜찮은 곳. 멈출 수 있는 곳. 쉬어갈 수 있는 곳. 시작할 수 있는 곳. 언제든 괜찮아질 수 있는 곳.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곳. 모든 순간의 나를 환대하는 곳. 모든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다리는 곳. 모두에게 똑같은 공간 위에 새겨진, 각자에게 다 다른 장소.
이 작품을 만날 다른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만 쭉 감상한 다음에, 글과 함께 그림을 다시 감상해 보시길. 그림의 한 장면, 그네의 한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시간을 먼저 가져보시길. 그 후 그네 옆에서, 그림 안에서 흐르는 문장의 ‘간결하며 묵직한 감동’을 경험해 보시길.
+
브리타 테켄트럽 작가의 전작 ⟪허튼 생각⟫이 삶을 지키고 세우는 ‘질문’의 책이었다면, 이번에 만나게 된 신작 ⟪삶이 머무는 자리, 그네⟫는 삶을 돌아보고 돌보는 ‘안부’의 책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유년부터 노년까지의 생의 장면을 시간 순으로 그리고 담아낸 리사 아이사토 작가의 ⟪삶의 모든 색⟫과 함께, ‘인생’을 보고 묻고 듣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권하고 싶다. 지금의 당신이 삶의 어느 맥락 위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당신을 외면하지 않는 장면을 만날 거라고. 지금의 당신을 겹쳐보고 싶은 장면을 만날 거라고. 지금의 당신을 둥글게 끌어 안는 장면을 만날 거라고. 작은 메모 하나 덧붙이면서.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