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는 세게 내려쳐야 하니까 포르테(f, 강하게)로 그린 걸까.
세발 괭이를 미(E)로 표현하다니, 정말 찰떡인걸.
홀로 밭에 남아 수확의 손길을 마저 기다리고 있는 비트는 마치 8분음표 같아.
수확한 농작물을 가득 실은 트럭에는 비플랫(B♭)이 그려져 있네. 농장에서의 하루를 끝마친 수고를 달래는 노래를 바장조로 연주하고 싶었던 걸까.
밭고랑도, 전신주 사이의 전깃줄도, 지붕 위의 안테나도 모두 오선지처럼 표현되어 있구나.
불 켜진 집 안의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으려나. 어떤 노래를 들으며 한 마음으로 한 밤을 함께 닫고 있는 것일까.
노란 초승달이 뜬 밤하늘 아래 ⟪페브 농장⟫.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기분으로, 별의 자리를 이은 듯한 모습으로 제목을 표현한 앞표지를 구석구석 천천히 바라보았다. 삶을 음악으로, 음악을 그림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그림책을 이렇게 또 한 권 만나게 되었구나- 하는 기대감을 포근히 끌어안고서.
일상의 빠른 효율이 일반의 바른 정답처럼 여겨지는 도시의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나’. ‘나’는 할머니의 편지를 받고서, 반려견 프레스토(Presto, ‘매우 빠르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와 함께 집을 나선다. 여러 교통수단을 번갈아 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페브 농장’이다.
페브 농장에는 이곳에서만 자라는 씨앗이 있다. 그것은 심은 곳곳마다 갖가지 모양의 음표가 쑥쑥 자라나는 신비한 씨앗.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음표로 자라나 저마다 다른 음을 내는 채소들과 함께, ‘나’는 분주한 낮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찾아온 고요한 밤의 시간. 공통의 검은색으로만 표현됐던 수많은 음표들은 밤이 되자 저마다의 고유한 색과 향을 찾고 갖게 된다. 밤하늘을 밝고 아름답게 수놓은 ‘쉼표’의 빛 아래에서.
한 곡의 음악은 ‘음표’로만 완성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페브 농장의 밤. 그곳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은 밭이라는 오선지 위에서 색색의 꿈을 꾸는 열매뿐만이 아니다. 매일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매일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심고 채우고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려가는 그림책 안팎의 마음들. 그 또한 저마다의 오선지 위에서 저마다의 색과 향으로 은은히 물들어 간다. 고요히 분주한, 모두의 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이민주 작가님의 글에 안승하 작가님의 편안한 색채의 그림이 더해져 완성된 ⟪페브 농장⟫. “낮과 밤이 함께 만들어 가는 페브 농장의 하루”라는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어 보며, 충전의 기호와 기회는 일상의 곳곳에 있음을 그림책의 곳곳에서 반갑게 발견하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삶이란 오선지 위에서 하루씩 담아내고 있는 오늘의 음표를. 삶이란 오선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쉼표를. 삶이란 오선지 위에서 그려질, 영원히 눈 감기 전까지는 언제나 미완일 나의 악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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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할머니가 따로, 또 같이 들었을 아름다운 노래는 ⟪페브 농장⟫ 뒷면지에 담긴 QR코드를 통해 함께 들을 수 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