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숱한 장난과 말썽이 ‘꾸러기’가 붙어 용인이 되던 때의 일이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다. 여느 형제들과 다르지 않게 치고받으며 자랐으나 일방적이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사이였다. 한 날은 방에서 장난을 치다가 본의 아니게 동생에게 치명타를 선사했다. 억누를 수 없는 비명이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오려고 할 때가 있다. 팔꿈치나 정강이가 단단한 물체에 갑자기 부딪혔을 때처럼. 비명이 부모님께 닿았을 때의 결과는 대체로 ‘혼쭐이 난다’였다. 동생의 입을 손으로 막고 사과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들을 건넸다. “쉿! 제발. 미안. 딱 한 번만 봐줘.”
“그날 오후 다시 사무실로(일은 해야 하니까!) 돌아가 보니 보라색 아이리스가 꽂힌 화병이 내 책상에 놓여 있었고 나를 저녁식사로 초대하는 볼링어의 쪽지가 있었다. 나는 어이없고 절망스러웠다.” (60-61쪽)
앞서 짧게 적은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게 만든 부분이다. 이미 과거에 성폭력을 당한 아픔이 있었던 저자가 담임 목사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다음의 심정을 적은 것이다. 일방적이고, 상대방의 주체성을 무시했으며, 타인이 겪은 고통을 제멋대로 재단했다. 나는 악행이 들통 나서 대가를 치렀고, 저자의 가해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저자는 언어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가해자는 축소의 언어를 사용한다. 존재의 뿌리를 흔들어버린 폭력과 억압을 ‘실수’, ‘장난’처럼 가벼운 말들로 치환한다. 치유, 화해라 쓰고 침묵을 강요한다. 기도하겠다는 말로 행동에 나설 용기가 없다는 뜻을 교묘히 숨긴다. 사회적, 집단적 문제를 사적 문제로 바꿔버린다. 일찍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서술한 것처럼 저자도 가해자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저변에 깔린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순결 문화, 강간 문화, 방어적 남성성 등의 핵심 키워드를 (이미 일어나버려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 사례와 연결하여 이해를 돕는다. 여러 사례들은 ‘여성의 객체화’라는 큰 틀에서 묶을 수 있겠지만 각 개념의 본질을 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그만큼 가슴 아픈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피해 여성들과 가족,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동생 다말, 밧세바, 피 흘리는 여인 등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입체적 독해라고 하면 적확하지 않을까. 문맥이나 특정 단어에 관한 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충분히 곁들여서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말은 용감하게 저항했으며(59쪽), 밧세바는 똑똑했으며(193쪽), 피 흘리는 여인은 능동적이었다(83쪽).
이런 글을 써내려가는 내가 다른 누구보다(특별히 남성)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지도 않을뿐더러 나 또한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고 그들에게 고통의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한 사람 때문이다. 그가 말했고, 직접 삶으로 보여준 흔적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반응하는 것뿐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예수님은 문화의 한계 밖에서 살기로 택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은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대하셨다. 예수님에게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였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성별의 구분 없이 도덕 행위의 주체가 된다.” (35쪽)
이 책이 여전히 그늘진 삶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서 불의에 저항할, 적어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용기가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조금씩 더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