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최근에 접했던 경험 몇 가지를 먼저 꺼내본다.
1) <박성진 "창조과학, 비과학·유사과학이라 생각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어떤 장관 후보자에 대한 기사
2) 현재 출석 중인 교회에서 주최하는 '창조과학예배' 포스터.
제목은 <창조론과 진화론>이고 포스터 한 쪽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원숭이가, 한 쪽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대결 구도라 생각했을 것이다.
3) 공동체의 한 구성원과 얘기를 하다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판적으로 한 번 읽어보라고 했더니 "그런 책 읽으면 (신앙이) 흔들릴 것 같고 혼란해질 것 같아서 안 읽을래요." 라는 답을 들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절 -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사도신경 -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지으신 창조주라고 고백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고백한다.
물론 여기까지도 괜찮다.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연세계를 지으실 때, 진화라는 방법을 쓰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진화를 선택지에서 제외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오히려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순식간에 선전포고가 되어버린다.
싸우자고 꺼낸 말이 아닌데 말이다.질문을 던진 그 누군가는 본의 아니게 원치 않는 낙인을 얻는다.
무신론자, 불순종의 아이콘, 신앙이 흔들리는 자 등등.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현대판 종교전쟁을 보는 것만 같다.
진화라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신앙과 과학을 둘러싼 질문들이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기에 아직은 척박한 현실이다.
대부분은 이 주제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몇 억 광년 떨어진 별이 관측되었는데 그 별은 도대체 언제 생긴 것인지, 가인이 도피성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디서 온 것인지, 창세기에 공룡은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신앙-과학 논쟁을 모르더라도 신앙생활을 지속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관심이 있는 소수의 일부는 진화를 무신론자의 구호 정도로 여긴다.
또 다른 일부는 쌓여가는 질문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서 힘들어 한다.
교회에서 신앙과 과학이 서로 주고받으며 쌓았던 이야기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그러하다.
누군가는 했어야 할, 혹은 들어주기를 바랐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야기를 쓴 25명 중 적어도 한 명쯤은 당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면, 그들은 누구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다.
신실할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성실하며, 진리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신앙과 과학 중 어느 한 편에 서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
싸워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점을 조금 먼저 이 고민에 직면했던 이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킨스의 책을 거부했던 청년처럼 주저하고 두려워하지는 않기를 소망한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기꺼이 동행해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쭙잖게 나의 이야기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신앙-과학 논쟁에 관심을 가지게 했던 사람은 ‘칼 세이건’이다.
어느 날, 서점에 들렀다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저자라서 무심결에 산 책이 「코스모스」였다.
친절하고 섬세한 그의 글은 지금 다시 보더라도 매력적이지만, 그가 그려낸 인류와 인간의 실존은 지극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
우주 한 구석에 처박혀서 살아가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존재.
경건하고 싶으면 예배당을 가지 말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라는 그의 말이 틀리지만은 않았다.
피조 세계의 광활함과 아름다움 앞에 자복하고 겸허해질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크게만 느껴졌으니 적어도 세이건이 의도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우연’은 종종 찾아오기 마련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말하더라도 괜찮다.
전능하신 그 분께서는 쓰지 못할 사람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