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기 있는 아이가 된건가, 비겁한 아이가 된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그리나 그것이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리면, 나 말고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진실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가령 내가 오늘 밤 죽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 진실 아닌가?- P59
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남을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수는 없는 거다.
- P67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순간 강렬하게 찾아들지만, 의지할 만한 물건은 못 된다. 곧 변형되고 때로는 퇴색되며 영영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어떤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다. 다만 애정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만이 나에게 정직했기 때문이다.- P85
내가 만들어준 고통 속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석고가 잘 굳을 때까지 고통을 연장시켜주는 것 뿐이었다. 석고에 파묻힌 그녀의 몸 위로, 마치 그 거대한 흰 더미에 잘못 얹혀진 것처럼 그녀의 조그만 얼굴이 솟아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질경거릴 때마다 그녀의 처진 뺨이 흔들거렸다.- P106
짐짓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커다란 몸에 갸날픈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이란 뭘까. 자신을 향해 혐오의 눈길을 쏘아 보냈던 남자애. 그 소년의 껍데기를 사랑하는가.- P122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의 살과 내장은 조금씩 조금씩 썩게 만들고, 흔적을 없에며, 마침내 흰 뼈 몇개만 남게 만든다. 그렇게 내 안에서 L의 기억이 쓱쓱 그린 밑그림처럼 단순해졌을 무렵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P126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엇인가가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결코 알아낼 수 없었다.- P187
그러나 어쨌든 E 자신이 말했듯이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P233
이따금 나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왜? 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이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언젠가 H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P271